몇 명의 여신도들에 둘러싸여 있는 검은 투피스의 여자가 목련처럼 우아한 모습으로 웃고 있다. 헉! 나는 가슴의 피가 역류하여 얼굴로 시뻘겋게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심호흡을 했다. 그럴 리가 없다. 동명이인이 허다한 세상이니까…… 그러나 그녀가 얼굴을 왼쪽으로 틀며 누군가를 향해 활짝 웃었을 때 드러난 덧니는, 버선코처럼 말려 올라간 코끝은, 틀림없는 내가 아는 이강희였다.

이곳에 이강희, 그녀가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알아볼까 봐 얼른 혜자 언니 쪽으로 몸을 돌렸으나 혜자 언니는 그녀를 향해 ‘전도사님, 안녕하세요. 여기는요’ 하고 나를 그녀에게 소개하려 하였다.

‘아냐, 언니. 오늘은 싫어,’ 하며 나는 의자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언니를 끌어 앉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강희가 다가오고 있다. 틀림없는 이강희,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다. 나는 대학 졸업 후 화상으로 얼굴이 바뀌었던 것이다.

두개의 테이블을 건너 올 동안 나는 재빠르게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내 이름을 김소희라고 해. 김소희! 알았지.’ 언니는 내가 나름대로 이름을 걸고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는 눈치로 이강희가 다가오자 나를 소개시켰다.

“전도사님, 제 아는 동생 김소희예요. 교회라곤 오늘 처음 나왔어요.”
“오, 김소희 자매님. 축복합니다. 이강희전도사라고해요.”
“……”

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만 목례로 인사했다. 그녀는 오른손을 내민다. 나는 그녀 오른손 엄지의 콩알만 한 검은 점을 노려보았다.

“김소희 자매님, 처음 뵙는데 낯이 익네요. 어디선가 뵌 듯해요.”

그러자 언니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한다. 나는 언니 팔을 세게 꼬집었다. 정말 싫다는 우리들의 신호다. 언니는 ‘전도사님 다음 주에 뵈요, 오늘은 제 동생이 몸이 안 좋아서 이만’ 하고 나를 끌고 나왔다. 등 뒤에서 그녀가 말했다.

“김소희 자매님. 기억하고 있을게요. 다음 주에도 꼭 나오세요. 한 주 동안 평강하시구요!”

나는 구역질을 느꼈다.

“언니. 미안해. 체했는지 토할 거 같아. 정말 .빨리 집에 가자.”

언니는 핸드폰으로 남편을 찾는다. 아마 그는 남자들끼리 모임이 있다고 그러는지 전화를 끊고는 우리 둘이 먼저 가자고 한다.

운전을 하면서 언니는 ‘괜찮아?’ 하고 물었다. 나는 잠든 척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지금 잠이 들 수 있단 말인가. 이강희, 그녀를 다시 만났는데……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나는 언니에게 분명히 말했다.

“언니. 오늘은 미안했어. 그 대신 다음 주에도 나갈게.”
“아. 정말! 내가 오늘 영혼을 빼앗기는 줄 알고 운전하고 오는 내내 기도했다.”
“누가 내 영혼을 빼앗아?”
“누군 누구야. 사탄이지.”
“사탄은 교회 안에 따로 있던데!”
“무슨 소리야. 너 오늘 예배당 안에 돌아다니는 사탄을 본 거야?”
“아, 아니. 아니야. 내가 아파서 예배도 제대로 못 봤으니 내가 사탄이라고,”
“얘는! 아무튼 들어가서 푹 쉬어라. 김소희!”
“아 맞아. 언니 꼭 내 이름을 김소희라고 불러줘야 돼. 남편하고 애들한테도 알려 줘. 난 내가 소설가 신은정이라고 알려지는 거 당분간 싫거든. 뭐, 아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그래두, 언니 신앙에만 몰두할 수 있게 도와줄 거지?”
“그런 이유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김소희 씨! 잘 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앨범을 찾았다. 그러나 대학 때 강희와 찍은 모든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 태워버렸다.

나는 혹시라도 하고 앨범을 뒤적였으나 그녀와의 흔적은 그림자도 없다. 나는 대학 졸업 앨범을 꺼냈다. 잠깐 망설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한 번도 들춰 본 적이 없는 앨범이었다. 이 앨범을 펼친다는 것은 나의 대학 시절을 펼치는 것이었고 그것은 절망의 나락으로 나를 밀어 넣기 위해 마수의 손아귀처럼 은밀하 다가왔던 이강희를 다시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교 3학년 개강 때 우리 영문과에 새로운 복학생들이 4명이나 들어왔다. 김재호 형은 개강파티에서 내 옆에 앉았다. 그 후 재호 형은 항상 내 옆에 붙어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캠퍼스커플 씨씨로 불렸다. 그는 그 당시 흔치 않은 어학연수를 다녀온 사람이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잘 불렀기 때문에 어디가나 모임에서 중심에 서는 사람이었고 눈에 띄는 만큼 늘어나는 여학생들의 시기와 질투를 나는 즐거움으로 감당해야 했다.

강희는 불문과였지만 우리는 영화동아리에서 만나서 친해졌다. 강희는 영리한 아이로 과 수석을 도맡아하며 장학금을 쓸어갔고 영화광이라 해도 좋을 만큼 동서고금의 영화에 능통한 아이였다. 그녀를 아는 이들은 그녀를 페르시안 고양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어깨를 기대거나 등을 기대거나 그렇게 몸을 밀착시켜야만 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여학생들이 그녀를 싫어했다. ‘조심해!’ 그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때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재호 형도 영화동아리에 들어왔다. 실제 3학년이면 취업 준비로 동아리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는 않지만 재호 형은 복학 전 영화 동아리 부회장까지 지냈기 때문에 자주 얼굴을 보였다.

우리 동아리는 20명쯤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문화원으로 영화를 보러 간다거나 J대학의 연극영화과 학생들의 실습을 참관한다든지 하는 곳에는 10여 명 정도가 몰려 다녔다. 강희는 누군가 같은 과 선배를 사귄다 하면서도 언제부턴가 재호 형과 내가 가는 곳에 따라 다녔다.

독일문화원에서 퀸터 글라스의 양철북을 관람할 때였다. 우리 영화동아리 10명은 좌석 앞뒤로 나란히 앉았다. 다른 관객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잘 보기 위해 중앙에 몰려 앉았다. 우리 줄에 민우, 형식, 강희, 나, 그리고 재호 형이 앉아 관람을 시작했다. 상영 중간에 강희가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나가더니 돌아와서는 재호 형의 옆자리에 앉아버렸다. 나는 강희가 중간 자리라 다시 들어오기가 미안해 그러는구나 생각했다.

영화가 끝난 후 재호 형이 나에게 말했다.

“강희 별로다. 자꾸 몸을 기대더라고.”

그러나 나는 웃고 말았다.

“개 원래 그래. 별 뜻 없어. 습관이야.”

그러나 나는 어떤 습관은 아편과 같이 야금야금 사람을 파멸시키고야 직성이 풀리고야 만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