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Q) 기도할 때 온 몸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뜨거워진다고 하는 체험을 간증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체험이 성령의 불이라고 하면 잘못 된 것인가요?

A)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실제로 몸이 뜨거워질 수도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령께서는 단지 우리 영혼만이 아니라 몸에도 역사하시는 분이니까요. 그러나 몸이 뜨거워지는 현상 자체가 성령의 불이라고 단정한다면, 자칫하면 우리는 크나큰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육감적이거나 현상적인 차원만 중시하다 보면 본질적인 차원을 놓치게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몸이 뜨거워지는 것은 나타날 수도 또 안 나타날 수도 있는 하나의 현상이며, 또 모든 이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도 물론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 역사의 본질에 마음을 쏟다 보면 이런 현상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이런 현상적인 차원을 금기시하는 것은 자유로운 성령의 역사하심에 저해요소가 될 수 있듯이, 또 반대로 너무 현상적인 차원을 추구하다 보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본질을 놓치게 되기 쉽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불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 본질의 가장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성령의 불은 곧 우리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다 보면 성령의 뜨거운 사랑의 불에 타올랐던 많은 인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17세기 청교도들에게는 성령께서 뜨거운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는 교리가 있었습니다. 이 확신은 인간의 이해와 추론의 범위를 초월한 초자연적인 확신이라고 묘사되곤 했습니다. 이 초자연적 확신이 나타날 때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변화되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의 이 확신은 새로운 회심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었지요. 굿윈(Thomas Goodwin)은 청교도들의 신앙 속에 이러한 구원에 대한 이중의 확신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방법은 대화식이다. 사람은 연기가 있기 때문에 불이 있다고 추단하는 것처럼, 중생의 표적들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한다고 추단한다. 다른 한 가지 방식은 직관식이다. 이것은 우리가 전체가 부분보다 더 크다고 아는 것과 같은 지식이다. 사람의 영혼에 임하여 그 영혼을 압도하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하나님이시고 그가 하나남의 소유이며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그를 사랑하셨다고 확신을 주는 빛이 있다(Thomas Goodwin, The Works of Thomas Goodwin, ed. by John C. Miller, 1:233).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확신을 갖기 전에도 이미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거룩하다고 할 수 있지만, 확신은 그를 실제로 그리고 더욱 거룩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확신은 신자의 영혼 속에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불타오르게 해주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머리 속으로만 받아들이는 그런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 온 몸과 영혼을 송두리째 반응하는 그런 전인적인 신앙의 단계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신앙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으로서, 이런 성령의 불을 받은 자는 모든 것을 바쳐 주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올인 하게 됩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 1세들이 지녔던 순수한 신앙의 길을 떠나 도덕주의와 형식주의로 전락하고 있던 청교도 2세대들을 향한 뜨거운 메시지를 전했던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메시지는 이런 성령의 불타는 사랑에 대한 역설로 가득 합니다. 그의 저서 Religious Affection에 나타난 신앙적 감동의 의미도 역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헌신에 몰입하라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웨슬리(John Wesley)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체험의 의미는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선교사로서 실패한 경험 이후,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자신의 주님이 되시고 그분이 자신의 모든 죄악을 가져가신 것을 명확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온전히 주님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이러한 웨슬리의 체험 역시 근본적으로 성령께서 부으시는 사랑의 불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성령 체험을 ‘온전한 사랑’(perfect love)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5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무디(D. L. Moody)가 성령을 충만히 경험할 때 그것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체험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온몸이 부서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때 무디는 그의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던 것이며, 바로 이것이 그가 경험한 성령의 불이었다고 로이드 존스는 말했습니다(D. Martin Lloyd-Jones, Joy, Unspeakable, 80).

그러므로 이러한 감동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체험에 의해서 촉발되며,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감동은 이렇게 깨어나서 자라나갑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앞에 우리도 역시 사랑으로 그분 앞에 응답하는 삶, 그것은 위에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해집니다. 이 성령의 능력으로 세례 될 때, 우리의 영혼 속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이야말로 진정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불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사랑의 불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역사하십니다. 사랑의 왕이신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존재를 굴복하며 나아갈 때 성령의 능력은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