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김 박사(美 쉐퍼드대학교).
바울 사도가 파악한 십자가

십자가의 비밀이 심오한 것은 십자가의 지혜와 능력이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에 함께 적용되기 때문이다. 율법을 어김으로써 발생된 범법 조항을 무효화시키는 것은 이 세상적 차원의 일이다. 그러나 십자가가 무효화하는 것은 세상적인 차원에서만 국한 되지 않는다. 여기에 또다른 깊은 비밀이 있다. 십자가는 영적 세계의 일에도 영향을 미친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그것을 파악한다. 예수님께서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려고 십자가로 승리하셨”(골로새서 2:15)다는 것이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렸다는 표현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한국말 번역이 어렵게 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개념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어 성경 중 NIV 번역은 이 부분을 ‘disarmed’, 즉 무장해제시켰다고 표현한다. 이 말은 영적 세계 속에 있는 영적 능력자와 권력자, 즉 각 계급에 속한 악령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승리하셨다는 말이다. 무장해제하신 방법이 십자가였던 것이다.

십자가로 무장해제시켰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완성한 대속의 죽음과 용서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무효화함으로 더 이상 어둠의 세력들이 우리의 죄에 대하여 빌미를 잡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죄가 없기에 그것으로 우리를 속박했던 악령들이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그러므로 이 땅의 범법 행위를 용서해줄 뿐 아니라, 그런 우리의 범죄를 통하여 우리를 괴롭히는 영적 세계에 있는 악령들이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는 능력이 있다. 유대의 어떤 능력이 이것을 해줄 수 있으며, 헬라의 어떤 지혜가 이것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하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십자가 이외에는 알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선포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세계관

여기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즉, 인간은 단순히 우리끼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천사들이 있고, 또한 악령들이 있어서 그들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우주적 진리를 전제한다. 악령들이 죄를 근거로 인간들의 삶을 주장하는 본질도 파악한다. 이것이 여타 철학자들과 종교가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일반 철학자와 종교 연구가들은 인간이 보고 관찰할 수 있는 이성적 세계에 국한하여 인간과 우주를 보기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이해하는 세계가 다인 것처럼 착각하고 부분적인 것을 전체인 양 궤변을 주장한다. 이들은 세상의 학문적 주체적 역할을 하기에 영적인 또 다른 현실들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기적을 행하면 신령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헬라인들은 이성과 지성만을 의지하며 살려 하였다. 그들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학자, 철학자, 종교가들은 영적 세계를 상징적이고 동화적인 유치한 것으로 폄훼한다. 이러한 현상은 바울 사도의 시대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바울 사도의 변화, 그 비밀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어떻게 이런 깊은 비밀을 깨달았는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는 예수님 생전에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지 않은, 우리와 똑같은 입장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바울과 예수는 적으로 만났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한 이후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은 제자들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진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유대교도들은 이런 예수 잔당들을 이단으로 보고 그들을 죽이고 체포함으로 그 세력을 없애려 하였다. 바울은 이 일에 앞장섰다. 그는 예수님을 증거하던 스데반 집사를 유대교 폭도들이 돌로 쳐 죽일 때 그들의 옷을 보관해줄 정도였다(사도행전 7:58). 또한 그는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기도 하였다(사도행전 8:3). 그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사도행전 9:2) 하였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하늘에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이며 소리가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사도행전 9: 4-6). 다메섹이란 마을에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잡으러 가던 그가 오히려 예수에게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 그의 이름은 사울로 불렸다. 사울은 유대식 이름이다. 사울은 “희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베냐민 지파 소속의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이름으로 왕적 권세를 자랑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그는 회심 후 작은 자라는 뜻의 로마식의 이름인 바울을 썼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작은 자 됨과 로마 문화권의 이방인들을 위하여 부르심받은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다메섹으로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였지만 바울은 영적 현실인 환상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을 만나는 상황에서 빛의 강렬함으로 인하여 그는 3일간 장님이 된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됨으로 사람 손에 끌려 다메섹에 가서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한다. 그는 후에 하나님의 보낸 사람인 아나니아를 통하여 기도를 받고 눈의 고침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먹고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과 며칠간 함께 있은 후 성령에 충만함을 입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다(사도행전 9:20). 이를 들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죽이려 함으로 그가 피했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 다음에 생긴 변화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바울 사도가 버린 것, 바울 사도가 잡은 것

그는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고, 신앙적으로는 바리새파에 속한, 당시 인텔리이자 지도층이었고, 학문으로는 당시 최고 지성이었던 가말리엘의 제자였으며, 세상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생활면에서는 텐트 기술자로 당시로서는 존경받으며 살 만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 그리스 철학자들은 유랑하면서 남들을 가르치고 남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살았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리스인 입장에서 보면 자생력을 가진 드문 철학자였으며, 유대인 입장에서는 로마 시민권까지 가진, 억세게 운 좋고 경건한 바리새인 유식자였다. 그런 그가 그 모든 세상적인 것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립보서 3:8, 10-11)”

바울 사도는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이라고 주저없이 고백한다.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모든 것은 배설물과 같은 것이라고 여긴다. 그가 배설물로 여긴 것들은 실로 당시 유대인이라면 모두 원했던 자격증과 같은 것이었다. 자신이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철저한 이스라엘 전통 속의 사람이요, 베냐민 지파로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파에 속하여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으로 당시 바리새파의 원수였던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라고 자신을 밝힌다(빌립보서 3: 5-6).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