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이 울리는데 눈을 뜰 수가 없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더 버텨본다. 드디어 끊어졌다. 혜자 언닌가? 시계를 보니 12시가 다 됐다. 새벽 4시쯤 침대에 누었으니 많이 잔셈인데도 온 몸이 물먹은 솜처럼 노곤하게 가라 는다. 다시 벨이 울린다. 이번엔 핸드폰이다. 엄마다. 웬일이지. 주말도 아닌데. 엄마와 내가 통화하는 시기는 매주 토요일 아니면 일요일이었다.

“나다.”
“무슨 일이우? 주말도 아닌데?”
“……”
“엄마!”

엄마는 두세 번 내가 불렀음에도 대답이 없다. 분명 무슨 일이 생겼음에 틀림없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의사가 뭐라 그래요?”
“나 아무래도 암에 걸린 것 같다.”
“뭐라구요?”
“지난번부터 자꾸 소변 후에 피가 나와서,,, 생리 끊긴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동네 병원에서 암 같다며 큰 병원으로 가 보란다.”
“알았어. 엄마. 지금 내가 모시러 갈 테니 준비하고 계셔.”

나는 서둘러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잡지사에 원고를 메일로 보내고 혜자 언니한테 전화를 할까 하다가 다녀와서 하기로 한다. 화장도 안하고 모자를 눌러쓴 채 지하 주차장을 뛰어 내려가 차를 탄다.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잡자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 번 터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고 나는 핸들에 머리를 박고 소리쳤다. ‘안 돼. 이대로 돌아가시면 너무 억울한 인생이잖아요. 엄마가 너무 불쌍해. 사랑 한 번 못 해 보고…… 엄마……’

엄마 나이 이제 63세다. 엄마는 아직 젊다. 여전히 고운 피부와 풍성한 머리숱은 엄마를 50대 초반으로 보이게 한다. 나는 늘 엄마에게 남자 친구가 있었으면 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빠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이후 엄마는 늘 혼자였다.

하루 종일 말이 없던 오빠는 결혼 후 미국으로 훌쩍 이민을 가버렸다. 엄마에게 며느리가 함께 가시자고 빈말이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오빠처럼 그렇게 말이 없던 그 여자는 그 속이야 어떻든, 보이는 것으로는 세상 말종에 속했다.

엄마는 술만 먹으면 남편 복이 없으면 자식복도 없다더니 며느리 복까지 지지리 세트로 박복한 인생이라고 탄식하셨다. 그나마 재복은 아주 없지 않아 홍은동 재개발 아파트 딱지를 사고팔면서 이룬 서너 개의 적금통장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방이 7개나 있는 집도 처분하여 잠실로 이사했다.

이상한 것은 30살이 넘어 과년하도록 결혼을 안 하는 나에게만은 엄마가 관대한 것이었다. 가끔 ‘너는 사귀는 녀석도 없냐’ 하고 의중을 떠보기도 했지만 늘 책이나 껴안고 컴퓨터 앞에서 글이나 쓰면서 구들더께마냥 집 안에만 박혀 있는 나를 그다지 꺼려하지 않는 눈치였다.

여자가 능력만 있으면 혼자 사는 것도 괜찮다며 실팍하게 여문 조기 살을 내 밥숟갈에 얹어주며 바투 다가앉을 때 나는 후다닥 정신이 드는 느낌이었다. ‘운명이 대물림되는 겨,. 이것아! 남자 만나 시원찮으면 진즉 걷어 차, 니 외할머니도 25세 때 혼자 되셨다. 나두 니 아빠 돌아가실 때 33살이었어, 그리고……’ 차마 다음 말을 하지 않으셨으나 나는 딸의 운명에 고약한 딴지를 거는 무지한 엄마의 예언에 그만 온몸의 진액이 누군가에 의해 졸지에 증발되어지는 듯한 정신적 공황을 겪어야 했다.

“엄마, 나두 작은 아파트 하나 얻어서 나갈래.”

나는 오랫동안 고심한 후 무수한 연습을 거쳐 가장 엄마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완곡한 어법으로 아주 심상한 척 말했다. 의외로 엄마는 담담했다.

“왜?”
“같이 작업하는 작가들이 앞으로 함께 밤샘을 많이 할 거 같구…… 또……”
“여기서 하면 누가 뭐래냐? 에미 혼잔데…… 알았다. 근데 설마 너 누구 있는 거 아니냐?”
“아이, 엄마두, 그러면 내가 벌써 말씀드렸지……”
“재호 녀석은 내 마음에 꼭 드는 녀석이었는데……”
“엄마! 그 얘기 아직도 하우!”
“아니. 니가 그 녀석 이후는 아무도 사귀지 않으니 하는 소리다. 뭐 혼자 사는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아무튼, 나 아파트 하나 얻어 줘. 나 시집갈 밑천 있잖아.”

나는 엄마의 쓸쓸한 눈동자를 기억하지 않기 위해 시선을 사선으로 엄마를 비꼈으나 찰나의 적막함이 있었고, 엄마의 깊은 한숨이 후하고 터졌고,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감추려는 모녀의 처절한 몸부림이 아주 잠깐 동안 있었다.

“좋을 대로 하려무나. 어차피 니 인생 니가 사는 것이니까.”

엄마는 이왕 분가 시키는 거 좋은 동네여야 한다며 분당과 일산을 샅샅이 뒤지셨다. 그리고 잠실과 비교적 가까운 분당에 주인이 외국에 가있어 오래 살 수 있다는 25평 아파트를 전세로 구해 주셨다,

그 이후 10년을 분당에 살다 올해 구리로 이사 오게 된 것이다. 평일이라 길이 한가하다. 잠실까지 20분도 안 걸리는 거리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엄마를 두고 한 달에 한 번도 제대로 가지 않았다니…… 지난달만 해도 얼굴빛이 좋았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설마 오진이겠지. 그래 오진일 거야. 어쩌면 변비나 치질일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내가 살았던, 지금은 엄마가 계시는, 그래서 특별한 백합아파트가 눈에 들어오자 나는 더욱 강하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