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김 박사(美 쉐퍼드대학교).
눈물의 크리스마스

2008년 12월 9일 아침 그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아내에게 포옹을 해주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본 아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오기 전 아장걸음으로 달려와 뽀뽀를 해준 딸 하은이의 모습도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날 그 사랑스런 아내와 15개월과 2개월 된 두 딸, 그리고 장모님을 한 순간에 잃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사는 로스엔젤레스에서 남쪽으로 두 시간 떨어진 샌디에고에 사는, 샌디에고연합감리교회 교인 윤동윤 성도이다. 그의 가족은 미국 ROTC출신 해병대 전투 폭격 101 훈련대 소속 비행사 댄 뉴바우어 소위(Lt. Dan Neubauer, 28)가 혼자 조종하던 F/A-18D 전투기가 그의 집을 덮침으로 몰사를 당하였다.

이 사건은 수많은 재수 없는 사고 중 하나로 잊쳐저 갈 뻔하였다. 2008년 12월은 미국 대통령 선거와 이라크 전쟁,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와 대공황의 위협으로 웬만한 사건들은 다룰 여력이 없었던 달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들도 울었고, 보도를 접한 세계 사람들이 울었었다. 그것은 사고 직후 윤동윤 성도가 보여준 깊은 영성에 근거한 인간미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상실의 아픔에 대하여 어찌 해야 할지도 모르며 안절부절한, 37세의 우리와 동일한 연약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사고 조종사를 위하여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가 이 사고로 인해 고통받지 않기를 원한다. 나는 그가 이 나라의 보물들 중의 하나인 것을 안다.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나는 그에 대하여 어떤 나쁜 감정도 갖고 있지 않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것을 안다”("I don't want him to suffer from this accident. I know he's one of our treasures for the country. And I don't blame him, I don't have any hard feelings. I know he did everything he could.")

또한 그는 한국에 있는 장인에게 아내와 장모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하여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그는 아내와 두 아이들, 그리고 장모께서 지금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고 계실 것을 안다고 말했다. 그의 인터뷰는 간간히 그 순간에도 옆 비행장에서 오가는 비행기의 굉음으로, 그리고 그의 격한 감정과 힘든 호흡으로 멈추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먼저 고난을 당하신 분들이 계신 줄 아는데,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이 일로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과연 무엇이 그러한 참혹하고 비참한 사건 속에서도 그런 악을 유발한 사람을 감싸고, 용서하며, 그를 걱정할 수 있게 했는가가 전세계인이 놀라고 감동받은 것이었다. 전세계에서 그에게 성금과 격려의 글이 답지했다. 그는 그 성금들을 아내가 평소에 지원하던 기독교 봉사단체에 돌리겠다고 발표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던 2008년 12월, 그는 예수님 탄생의 진정한 이유와 십자가에서 죽으신 진정한 이유를 전세계에 알린 메신저가 되었다. 인간이 어떻게 고통 속에서도 고귀함을 유지하면서 깊은 용서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기적은 때로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행하여진다.

치욕의 십자가, 최고 가치의 십자가

우리는 십자가형이 1세기 예수님의 당시에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악의 형벌임을 살폈다. 가장 고통스럽게, 가장 길게, 가장 공포스럽게, 가장 치욕스럽게 죽이는 방법이 십자가였다. 그러므로 벌거벗고 고통 가운데 죽는 십자가형은 죽음 자체 외에도 사회적인 수치감이 가중되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그러므로 죄악과 수치감의 상징이었다. 이것은 개인과 가문의 수치였다.

그런데 그렇게 죽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고린도전서 2:2)” 하였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갈라디아서 6:14) 고백한 사람이 있다. 이 고백은 그 당시의 십자가형의 참혹함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고 정신 나간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는 예수님의 생전에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승천 후, 예수쟁이들을 색출하여 죽이려는 무리와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작은 자라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는 사도 바울이다.

암호 해독 포인트

그런 그가 변화되었다. 그의 변화는 과연 어떤 이유와 과정, 그리고 결과를 맺었을까? 이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그의 고백과 더불어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고백을 비교하여 살필 것이다. 또한 그가 십자가 이해한 십자가의 의미, 그리고 변화 과정, 그리고 십자가에 대하여 그토록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던 암호 해독법 등에 대하여 살피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기초가 된 두 고백

바울, 그는 당시 유대의 전통과 문화 환경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식자도 아니었고, 소외계층도 아니었다. 그는 당시 지도자 계층인 바리새파이며, 매우 유명한 스승 가말리엘에게 교육을 받은 인텔리였다. 또한 그는 당대 최고의 국가인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천막을 짓는 전문인으로서 식생활에도 문제가 없었던 중소기업인 정도의 사람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그의 고백은 전직 어부였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사도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 16:16) 라고 고백한 것과 더불어 기독교의 기초가 되었다.

예수님을 죽도록 따라다닌 수제자 베드로와 예수쟁이들을 죽이려고 따라 다닌 바울의 고백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직 어부였던 베드로 사도의 고백은 예수님의 모든 진면목이 드러나기 전에 믿음으로 고백한 것이고, 인텔리 중의 인텔리였던 바울 사도의 고백은 모든 것이 허탈하게 끝난 것처럼 보이는 사건 후에 그 진면목을 알아 차리고 한 것이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과 3년을 함께 하면서 고백을 한 것이고, 바울 사도는 한번도 생전에 예수님을 보지 못한 채,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한 번 듣고 난 후에 한 것이었다. 베드로 사도의 고백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아들을 고백한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죽은 예수를 고백한다. 베드로 사도는 그가 고백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후 혼돈에 빠진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 예수님이 죽은 십자가에서 확신을 갖는다.

물론 한때 혼돈에 빠진 베드로도 예수님의 부활과 치유후 회복하여 대 사도가 되었다. 베드로와 바울 사도의 고백 모두 위대하고 기독교의 기초가 되었지만 차이가 있다. 우리에게 더 관심을 끄는 고백은 바울 사도의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여러 기적을 보고 한 영광된 희망을 가지고 한 고백이라면, 바울의 고백은 가장 비참한 고난을 당한 예수님과 함께하는 비장한 것이기에 그러하다. 좋을 때는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어려움 속에서 그 진면목을 보는 것이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과연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 대하여 무엇을 알았기에 죄와 수치의 상징인 십자가 외에는 알고 싶지 않다고 했을까? 다음주 계속.

이 글은 <크로스 코드>의 출판사 비전 북하우스 제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