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다음에 꼭 한 번 갈게. 이번 주는 정말 안 돼. 일이 밀렸어,”

언니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이번 주에 유명한 가수가 와서 간증한댔는데……”
“누구?”

“왜? 오려고?”
“아니. 정말 바쁘다니까. 근데 누가 오는데?”
“유장미! 있잖아 80년대 유명한 가수!”
“뭐야. 그 여자, 대마초에 유부남 간통에 온갖 추잡은 다 부린 여자 아니야. 그런 여자가 온다는 거야.”
“그런 소리 마!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거듭났어. 지금은 천사야. 천사!”

엉덩이를 털며 일어날 듯한 언니는 다시 앉을 기세다.

“알았어, 알았어, 하나님의 은혜! 내가 다음엔 꼭 한 번 갈 테니 오늘은 그만 가셔.”

나는 밀어내듯 언니를 배웅했다.

끈질긴 인연이고 소중한 인연이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친할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엄마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집을 팔아 치웠고 우리는 상계동에서 뚝 떨어진 서대문 쪽으로 이사했다. 집은 상계동보다 작았다. 방이 조금 큰 축으로 2개였다. 아무 돈벌이 기술이 없는 엄마는 남은 돈을 종자돈으로 시장 사람들에게 일수를 찍으며 돈을 모아 목돈을 만들었고 다시 작은 집을 팔아 상계동보다 더 큰 집을 사서 월세를 받았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혜자 언니네 쪽에서 드문드문 안부 전화를 했다.

“아이고 우리 혜자네는 어찌 그리 하는 일마다 잘될까!”

엄마가 혜자 언니네 엄마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도 한때 주인집이었던 것을 상기시키려는 듯 엄마는 우리 집이 7개의 방을 가진 큰집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일 년에 서너 차례의 전화 통화일지라도 혜자 언니와의 관계는 전혀 멀어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혜자 언니네 아빠는 동네에서 정직한 이 씨라고 불렸다. 그는 ‘좋은 전파사’라는 가게에서 고장난 라디오나 텔레비전 따위를 수리해 주거나 전기에 관련된 소품들을 팔고 있었는데, ‘좋은 전파사’에서 한 번 손을 본 전자제품들은 신기하게 다시는 고장이 안 난다는 소문이 났다. 더욱이 가격도 다른 동네를 일일이 비교하며 조사해 본 동네 짠순이 아줌마들의 평가에 의하면 너무나 정직한 가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정직한 이 씨라고 부르게 된 결정적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눈이 유난히 내리던 겨울날 새벽에 이 씨는 눈을 치우다 지갑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안에는 상당한 수표와 돈이 들어 있었고, 화들짝 놀란 그는 경찰서가 문을 열자마자 달려가 신고를 했다고 한다. 만취한 상태로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지갑을 떨어뜨린 사람은 동네에서 제일 돈이 많다고 알려진 높은 담장집 사람이었고 당연히 많은 보상을 표시했으나 이 씨는 한 동네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극구 사양했다는 소문까지 한동안 동네는 온통 이 씨 이야기뿐이었다.

나는 그때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네로가 아로아 아버지의 지갑을 주워 주는 이야기와 너무나 똑같은 상황에 은근히 혜자 언니 아빠도 너무 착한 주인공같이 빨리 죽을까 봐 한동안 두려움으로 그를 지켜봤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좋은 전파사’는 날로 번창하였고 알뜰살뜰한 혜자 언니 엄마의 절약과 저축으로 작고 초라하지만 번듯한 이름 석 자 박힌 문패를 탕탕 박을 수 있는 자신들만의 집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혜자 언니네가 이사를 나가는 날 나는 얼마나 외로웠고 쓸쓸했던가!

“은정아, 바로 저기 언덕만 올라오면 되니까 자주 놀러오렴. 아! 우리 집도 파란대문집이야.”

언니네 엄마는 기쁨으로 들떠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나는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 이삿짐이 하나 둘 쪽문을 통해 나가는 것을 보았다. 나나 혜자 언니나 셋방살이에서 벗어나 자기 집을 갖는 다는 사실이 얼마나 인생에 살맛을 더하는가 따위를 알 리 없으므로 무료했던가… 혜자 언니가 공깃돌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100년 먹기 하자.”
“싫어!”
“엉, 공기놀이하기 싫어?”
“……”
“그럼 뭐하고 놀까?”
“언니! 이사 가서 좋아?”
“몰라, 근데 엄마가 좋은 일이래. 어제 엄마가 그러시는데 나도 큰 대문으로 들어갈 수 있어서 그게 젤로 좋은 거래. 채송화랑 맨드라미가 있는 마당을 밟을 수 있는 게 축복이래.”

나는 열려져 있는 우리 집 마당을 흘깃 보았다. 나팔꽃, 분꽃, 봉숭아, 채송화들이 오밀조밀 마당 한켠에 피어 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혜자네 아빠가 우리 마당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낡고 초라한 장롱이지만 도저히 쪽문으로 나올 수 없는 크기였으므로 우리 마루를 통해 마당으로 나와 활짝 열린 파란 대문을 통과해 트럭에 실려지고 있는 것을 내내 지켜보았다. 트럭에 장롱을 올리고도 혜자 아빠는 한동안 마당에 서성거렸다. 혜자 엄마는 마지막 짐을 트럭에 올리고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은정아. 이따 오후에 너네 엄마 오시면 내 다시 올 거지만 우선 우리끼리 인사하자. 그동안 고마웠다. 식구가 넷이나 되면 단칸방을 잘 안 내줄라 그러는데 네 엄마는 좋은 주인이셨어. 은정이도 우리 혜자하고 친하게 지내서 고맙고.”

정이 많으신 혜자 아줌마는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울먹이셨고 한마디를 더 붙였다.

“이제 우리 혜자도 번듯한 큰 대문으로 드나들 수 있단다….”

나는 아줌마가 왜 그 얘기를 두 번이나 내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