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김 박사(美 쉐퍼드대학교).
누가복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4:46).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7언중 세 마디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더불어 마가복음을 많이 참조했으므로 겹치는 내용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가와 마태가 공통적으로 언급한 말씀을 생략하고 다른 세 마디의 말씀을 알려준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른 말씀도 하시었지만 그 중에 기록자가 중요하다고 감동받은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누가복음의 이 세 마디는 전체 7마디 중 매우 큰 공백을 메워 준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은 왜 이 세 마디를 특별하게 기록한 것일까? 이 역시 누가복음의 전후 구조를 살피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첫번째 말씀인 기도를 하신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이 용서의 구체적인 대상은 일차적으로 자신을 못박은 로마 병사들이었다. 또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유대인들, 그리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이었다. 또한 아벨을 모른다고 부인한 가인과,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로 상징된 모든 인류를 상징하라는 것을 이미 살폈다.

누가복음의 독자는 로마 사람들

그러나 누가복음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누가복음이 로마의 데오빌로 각하(Theophilos)와 그를 통해 편지를 돌려 읽을 로마사람을 위하여 썼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을 못박은 로마 병사들을 용서하시며, 그것을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정죄하고 못밖은 로마를 용서하시는 것이다. 로마가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 것은 그로부터 270년이 지난 AD 300년이었다. 이것의 시작이 바로 십자가의 용서였던 것이다.

로마의 총독이 주장한 예수님의 무죄성

그러므로 로마 사람들에 대하여 누가복음은 매우 섬세한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이를 기록한다. 예를 들어 4복음서 중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빌라도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정보를 준다. 그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세 번이나 주장하였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다음은 특별히 누가복음 23장의 기록이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1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23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참조: 요한복음 18:38; 19:4; 19:6)

빌라도에 대한 기록은 4복음서에서 다 중요하게 언급이 되지만 누가와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빌라도가 예수님을 구하려 초조하게 애쓰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누가복음의 특수성은 누가복음이 마가와 마태복음의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를 따르면서도 빌라도의 무죄선언을 유일하게 언급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로마인들에게 로마의 총독의 견해를 중요시하여 제시하려는 뜻이다. 요한복음도 이 부분에서 같은 맥락으로 빌라도의 무죄선언을 중시한다.

로마 백부장이 증명한 예수님의 의인성

같은 관점에서 누가복음은 로마의 군인인 백부장의 언급을 중요하게 여겼다. 백부장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확인된 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누가복음 23:46)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하여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백부장이 예수님을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태복음 27:54, 마가복음 15:39)으로 말씀하신 부분을 포착한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의인 부분을 더 중요시할까? 이것은 그가 로마 사람이고, 백부장의 권위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의 군인 백부장이 예수님이 의인으로서 로마가 그를 죽일 죄가 없었음을 선포한 부분을 강조한다. 빌라도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로마사람의 입으로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은 이미 로마사람들도 예수님을 옹호하였음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믿음을 받아들일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행악자가 증명한 예수님의 구원자성

또한 누가복음은 로마사람들 뿐만 아니라 하류층의 사람들에 대하여 유별난 관심을 갖는다. 그러면서 누가복음은 유일하게 두 행악자들의 반응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앞선 장에서 살핀 바와 같이 두 행악자 중 하나는 예수님을 계속 비방하였고, 다른 한 명은 그런 행악자를 꾸짖는다. 로마인들 뿐 아니라 사악한 행악자도 예수님의 무죄를 선포하는 것이다. 누가는 이것을 매우 중요시하고 제시한다.

또한 누가는 이런 행악자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복을 주시는지를 기록한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이 강도는 로마에 의하여 십자가형에 처해진 사람들이었다. 로마 정권이 범죄자로 처단한 이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를 구원할 뿐 아니라, 자신이 가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낙원으로 인도하신다는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인들에게는 실로 파격적인 개념이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방의 흉악범으로 죽어 마땅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하나님이 계신 낙원에 간다는 것은 파격이었다.

로마의 심판을 비웃는 예수님의 심판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심판을 보게 된다. 로마의 심판이 아니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심판이다. 로마 시저의 심판은 죽이는 심판이지만,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심판은 낙원의 약속이었다. 이것은 로마의 심판을 비웃는 것이다. 로마의 심판이 최종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의 권위에 대한 최종 부정인 셈이다. 최종 심판, 최종 권세가 예수님께,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 없이, 예수님을 알지 않고는 사실은 로마의 시저조차도 영원한 죽음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누가복음의 세 말씀의 구조는 하늘의 영광의 보좌에 계신 아버지를 부름으로 시작하여, 이 땅의 최악의 사람의 상징인 행악자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드리는 삼중 구조이다. 가장 높은 곳의 하나님과 가장 낮은 곳의 흉악범의 대조는 마태복음에서 버려짐과 부활이라는 대조만큼이나 뚜렷하고 강렬하다.

아버지 그리고 또 아버지

누가복음은 유일하게 예수님의 말씀이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로 끝나는 중요한 구조를 알려준다. 사실 아버지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쓰는 것은 요한복음으로 145회가 쓰인다. 이에 비하여 마태복음 40회, 마가복음 5회, 누가복음 35회이다. 누가복음은 아버지라는 단어를 가장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예수님의 정황을 포착한다.

다른 복음서에서 알려주는 십자가의 7언엔 아버지의 호칭이 없다. 마태와 마가의 하나님은 전능자 하나님이시다. 아들까지 심판하시는 전능자, 권세자로써의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을 두 번 부르신다. 요한복음에서는 어머니라는 용어가 있다. 따뜻한 가슴의 어머니, 아들이 죽어가는 보는 비련의 어머니. 그 사이에 누가복음의 아버지가 있다. 하늘의 하나님, 땅의 어머니. 그 사이의 아버지는 전능자 하나님과 따뜻한 어머니를 묶어 주는 용어이다.

아버지인 신, 신의 자녀들

이것을 통하여 누가복음의 독자들인 로마인들에게 인격적 관계를 가진 신을 소개한다. 그 신이 전 우주를 창조하셨고, 전 우주를 섭리로 다스릴 뿐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강조하여 소개하는 것이다. 로마의 신같이 통치하고 전쟁을 통하여 탈취하는 신이 아닌 인격적으로 만나고 진정한 사랑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신을 소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을 로마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로마의 병사에게, 로마의 빌라도에게, 시저에게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애원하지 않았다.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였다. 이것은 로마 사람들에게는 매우 도전적인 것이었다.

이 글은 <크로스 코드>의 출판사 비전북하우스 제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