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
1946년 겨울 이스라엘의 사해 북서쪽에 위치한 쿰란 동굴에서 어느 양치기 소년에 의해서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성경의 최고(最古) 사본이 발견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로 인해 주변 동굴을 조사한 결과 11개의 동굴에서 주전 2~3세기부터 주후 1세기경에 기록 된 것으로 확인된 약 30,000 여 조각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그것을 사해 사본이라고 하는데 후에 계속된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해서 그 사본들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 밝혀지고 그것을 전 세계에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 이스라엘 문화재청(IAA)은 구글(Google)연구 개발 센터와 협력하여 약 3만여 조각으로 구성된 900개의 필사본 전문을 고해상도 기술과 다중 스펙트럼 기술 등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 촬영하고 2011년 초 경에는 인터넷 상에서 전 세계 누구나 어디서든지 자유롭게 이용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디지털화된 이미지로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크리스천투데이 2010.10.5)

그렇다면 이슬람의 경전 꾸란의 경우는 어떤가? 지금까지는 현존하는 꾸란의 최고(最古) 사본이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사본과 이스탄불의 톱카프 사본으로 알려져 있었다.

톱카프 사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이슬람에서 주장하는 사마르칸트 사본의 내력은 이렇다. 즉 이슬람의 세 번째 칼리프인 오스만은 꾸란을 수집하여 한 종류의 원본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폐기해 버린 후 원본으로 정한 꾸란을 4~5권 복사해서 여러 지역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 쿠파로 보낸 사본을 알리(Ali)가 보존하였다가 티무르가 그 지방을 점령하면서 자신의 수도인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로 가지고 갔다고 한다.

거기서 1868년 까지 오랫동안 보관되었는데 그것을 소련이 가져다가 피터스부르그 도서관에 보관했던 것을 레닌의 10월 혁명 이후 무슬림들을 달래기 위해서 꾸란을 돌려보내기로 하고 몇 군데를 거쳐서 결국은 1924년부터 다시 타쉬켄트에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인터넷 사전 위키피디아 참조)

이 외에도 다메섹 사본설, 이집트 사본설 등이 있지만 그것은 후대의 사본이고 가장 오래된 사본이 사마르칸트와 톱카프 사본이었다는 것은 무슬림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이들 사본은 오스만이 살해당할 때 꾸란을 읽다가 그것을 안고 죽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사본의 검은 부분이 그가 죽을 때 흘렸던 피의 흔적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기에는 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사마르칸트와 톱카프 사본은 쿠픽(Kufa에서 사용하던)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쿠픽 아랍어가 8세기 말부터 사용되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부 이슬람 학자들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면서 쿠픽 아랍어가 7세기 말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몇 가지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오스만이 메카와 메디나에서 사용했던 언어는 꾸라이시 방언이었다. 오스만은 꾸라이시 사람들 3명을 불러서 ‘만일 수집된 꾸란이 다른 방언으로 기록된 것이 있다면 꾸라이시 방언으로 고치라’고 최종 감수를 명했었다고 한다. (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07) 꾸라이시 방언은 메카와 메디나에서 사용하던 히자즈(Hejazi) 아랍어에 속한다. 그러므로 무슬림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쿠픽 아랍어가 7세기에도 사용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해도 오스만이 편집을 완료했던 꾸란의 사본이라면 히자즈 아랍어로 기록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알려졌던 가장 오래된 꾸란의 사본은 쿠픽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1972년 예멘의 사나에서 히자즈 아랍어로 기록된 꾸란의 최고(最古)사본이 발견되었다. 이는 쿰란 동굴에서 성경의 최고(最古)사본이 발견된 것과 비길 수 있는 역사적인 대 사건이었다.

예멘의 사나 대사원(The Great Mosque of Sana'a)의 다락방을 수리하는데 거기서 많은 양피지 사본들이 발견된 것이다. 일꾼들은 대수롭지 않은 쓰레기로 생각해서 감자 자루에 담아서 약 20 자루 정도 되는 것을 한쪽에 치워 두었다가 수리가 끝나자 그 자루들을 첨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던져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예멘 정부의 고대유적 담당관(President of Yemeni Antiquities Authority) 가디 이스마일리 알 아크와(Qadhi Ismaili al Akwa)씨가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는 국제사회에 이 고대 사본들을 판독 복원해 줄 것을 호소한 결과 1979년 서독 정부로부터 복원 팀을 구성하고 재정을 지원하겠다는 허락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독일의 싸를랜드 대학(Saarland University)의 아랍어 서체 및 꾸란 고대어 전문가인 푸인(Gerd R. Puin) 교수의 지휘 하에 조사팀이 구성되었다. 탄소시험(Carbon-14 test) 결과 몇몇 필사본들은 이슬람 이전의 것도 있고 주후 645-690년 것도 있고 710-715 년까지의 것도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되었던 꾸란의 최고(最古)사본들은 9세기 산물로 판명되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것이었다.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 조사결과 틀에 얽매이지 않은 절(節)의 배열과 약간의 본문의 변형과 희귀한 형식의 철자법과 예술적 각색이 드러났다고 한다. 어떤 사본들은 초기 히자즈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그것 역시 이전의 것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썼다는 것이 확인 되었다고 한다. 1983년부터 1996년까지 약 40000 조각의 사본들 중에 8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12000 사본을 포함한 15000 사본들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1999년에 월간 대서양(Atlantic monthly)의 주필(Executive Editor) 토비 레스터(Toby Lester)씨는 푸인(Puin)교수의 사나 사본 연구 결과에 대해서 “이는 현존하는 꾸란의 가장 오래된 사본이며 표준 꾸란 본문에 대해서 작지만 흥미있는 탈선 현상을 드러냈다. 본문을 연구하는 우리 역사가들에게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꾸란을 인류에게 전달된 변치 않는 완벽한 신의 말씀이라고 믿어 온 정통 무슬림들에게는 뜻밖의 고민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15000개의 사본이 복원되었지만 추가 연구를 하려고 하자 예멘 이슬람 당국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며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푸인의 동료인 이슬람 역사가 그라프 본 보트메르(Graf von Bothmer)교수는 1997년에 35000개의 마이크로필름을 찍어 독일로 가져왔다. 이것들은 곧 면밀히 검토되어 자유롭게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이들의 연구를 통해서 꾸란은 하늘에 보관된 원본이 무함마드에게 전달된 완벽한 신의 말씀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무너지게 될 날이 곧 올 것이다.

이 연구의 책임자인 푸인 교수는 지금까지 발견된 꾸란의 최고(最古) 사본을 연구해 본 결과 아래와 같은 결론을 1999년 월간 대서양(Atlantic Monthly)지에 발표했다.

“내 생각에 꾸란은 무함마드 당시에도 전부 이해가 안 되던 구절들의 혼합물 같은 것이다. 많은 부분들은 이슬람 100년 전의 것들이다. 이슬람 전통에도 모순되는 많은 기독교 자료들이 있으며 원하기만 하면 그 자료들을 통해서 총체적인 반(反)이슬람 역사도 이끌어낼 수 있다. 꾸란은 명백하다고 말하지만 자세히 연구해 보면 대여섯 절마다 말도 안 되는 문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꾸란 본문의 5분의 1은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꾸란을 번역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꾸란이 이해 불가능하며 심지어는 아랍어로 조차도 이해가 안 된다면 어떤 언어로도 번역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반복적으로 꾸란은 명백하다고 주장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으며 거기에는 확실하고도 심각한 모순이 있는 것이다.”

푸인 교수의 이런 언급에 대해서 2000년도 가디언(guardian)지와의 인터뷰에서 캠브리지 대학 “이슬람 연구” 교수인 타리프 칼리디(Tarif Khalidi) 박사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꾸란연구”를 강의하는 알렌 존스(Allen Jones) 교수는 “9세기 까지는 꾸란의 발음과 단어들이 확정되지 않았었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존스 교수는 ‘꾸란이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서 아마 사나 사본은 오스만 사본이 도착되기 전에 사용됐던 것이며 오스만 사본이 정착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위키피디아 인터넷 사전 ("Sana'a manuscripts" 및 "History of the Quran"참조)

그러나 성경의 사해 사본처럼 자신 있게 공개하지 못하고 오히려 접근을 막는 것은 뭔가 숨기고 싶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행위다. 꾸란 학자들이 말하는 꾸란의 점진적인 발전 개념은 하늘에 있는 원본을 가브리엘 천사가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것이라는 지금까지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꾸란의 고대 아랍어 전문가의 견해가 이렇다면 꾸란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일부 학자들은 오스만 편집본이 만들어 졌다는 주장도 신뢰할 수 없다고 한다.

오스만 편집본이 있었다는 주장은 무함마드 사후 200~230년이 지나서 만들어진 하디스에 근거한 것인데 이는 구전에 의한 것이며 아직 그를 입증할만한 믿을만한 증거가 없으며 현존하는 꾸란의 완전한 사본은 9세기에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Crone, Patricia & Cook, Michael 공저, The Making of the Islamic World, Cambridge대학 출판사, 1977, p.3)

이제 꾸란의 사나 사본의 정직한 번역판이 나오면 타쉬켄트와 톱카프 사본도 번역하여 비교해 보자는 운동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거대한 공산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던 것처럼 이슬람의 뿌리인 꾸란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밝혀져 엄청난 무슬림들의 대추수가 밀려올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