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Q) 그동안 한국교회 안에서 방언에 대한 교리적인 논쟁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논쟁의 쟁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리고 방언 논쟁에는 주로 어떤 분들이 가담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A) 한국교회 안에서 1960년대 이후에는 방언이 성령론의 주요 논제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오순절교단인 하나님의성회(Assemblies of God)는 1953년에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전통에 따라 방언에 대한 강조를 오순절신앙의 본질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순복음교육연구소 편, 「하나님의성회 교회사」, 148-9). 국내에서 전통 오순절주의 성령세례론을 주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조용기 목사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성령세례의 대표적인 외적 표적으로서의 방언을 들었습니다(조용기, 「5중복음과 삼박자 축복」, 117-8). 1960년대 이후 방언과 치유 사역 등을 중심으로 순복음중앙교회가 급성장함에 따라, 국내 신학계에서는 오순절주의를 향한 비판의 강도를 더욱 높였습니다.

오순절운동의 성령론에서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특색으로서는 방언, 예언, 이적 등의 ‘성령의 나타남’(Manifestation of Holy Spirit; 고전 12:7 참조)을 강조하여 이를 전도와 교회성장의 도구로 사용한 점입니다. 이에 맞서서 장로교 계통에서는 성령의 회개시키고 중생시키는 사역과 내면적인 ‘성령의 열매’에 강조점을 두고 성령론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결파에서는 한국 초대교회로부터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성령의 제 이차적 축복(Second Blessing)으로서의 ‘신자의 회개’와 ‘순간적 성결’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성령운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장로교에서는 사실 이 같은 문제가 야기되기 전까지는 성령론에 대한 큰 강조나 논쟁이 벌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성령론 확립의 필요성을 절감한 장로교 신학자들은 성령론을 전개하되 초자연적인 성령의 나타남이라든지 성령 은사의 계속성 등을 철저히 배제하는 노선을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신학계에서의 성령론 논쟁은 주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성과 지속성 여부의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방언에 대한 부정적 비판을 위해 신학적 기반을 제공한 것은 주로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영향이었습니다. 카이퍼(Abraham Kuiper)는 20세기 초엽까지 활동했던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개혁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그의 사상은 현대 개혁주의신학 발전에 큰 몫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는 성령의 편재성과 연속성과 불변성에 근거해서 볼 때 오순절적인 성령 강림을 다시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워필드(B. B. Warfield)나 개핀(Richard B. Gaffin)은 예언, 방언, 신유와 같은 특별 은사는 사도시대까지로 중지되었기 때문에 현대 교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B. B. Warfield, Miracles: Yesterday and Today, Real and Counterfeit, 5-6). 또 호케마(Anthony Hoekema)도 역시 기적적인 은사들은 사도시대로 종결되었다고 보면서, 오늘날의 방언을 말하는 현상은 심리학적으로 유발된 인간의 반응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Anthony Hoekema, What About Tongue Speaking? 128). 개핀은 오순절파 성령세례의 근본적인 문제가 신자의 경험 속에서 성령과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데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은사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방언이나 예언은 교회로부터 사라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Gaffin, Perspectives on Pentecost: New Testament Teaching on the Gift of the Holy Spirit, 144).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본격적으로 박형룡의 성령론이 <신학지남>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는 1971년 가을호와 겨울호에 “성령의 세례와 충만”이라는 글을 연재하였습니다. 이 같은 박형룡의 성령론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수학할 때 핫지(Charles Hodge)나 워필드 등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성령 강림의 단회성과 성령 은사의 중단성에 강조를 둔 것입니다. 이때부터 한국 개혁주의 신학계에는 박형룡의 「교의신학」(1972)을 중심으로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노선의 저술들이 잇달아 소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80년대에는 신성종, 김해연 등이 성령 은사의 중단성에 입각한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입장에서 방언에 대한 비판에 나섰습니다. 신성종은 “방언의 현상은 기독교만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며 다른 종교와 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방언의 기원을 성령에게 둘 수 없음을 보여 준다”(신성종, “신약에 나타난 성령론 -특별히 방언 문제를 중심으로-”, <신학지남> 48-2(1981), 23)고 하면서, 오늘날 행해지는 방언과 예언 등은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은사로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직과 성경 기록과 직결된 예언과 방언은 사도직이 끝나면서 종결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방언이 완전히 중지되었다고 보기에 어려운 이유는, 이 방언의 기원이 현대에 와서 반드시 성령만은 아니고 심리적인 경우나 인위적 조작의 경우나 심지어 사탄적 기원도 없지 않다는 점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신성종, 38).

김해연은 당시 교회에 성령세례에 대한 잘못된 오해들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제언을 다음과 같이 하였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방언하고 또 방언해야만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이론에는 도저히 동감할 수가 없다. 사도행전 및 제자만 방언을 했지 모든 신자와 제자가 했다는 성서적 근거는 없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방언과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방언은 다르기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으면 방언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김해연, “성령론(4): 성령세례와 충만에 관한 고찰”, <현대종교> (1984.9), 163).

그런가 하면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노선에 서있던 차영배, 안영복 등은 자기들의 성령론 입장이 방언을 동반한 오순절주의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변증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의 노선이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과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성령세례 전통을 충실히 따른 것임을 역설하게 되었습니다.

차영배는 1981년 여름호 권두언에서 당시 교계를 혼잡하게 하고 있던 성령운동의 여러 잘못된 현상을 경계하였습니다. 이는 특히 1970년대 이후 오순절주의에 대한 경계와 비판이 한국 신학계의 큰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주시는 세례가 소위 ‘聖洗’이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확실한 의식이 따르게 된다. 이러한 의식이 없는 단순한 방언은 그리스도의 세례일 수 없다”(차영배, “권두언”, <신학지남> (1981, 여름), 6). 이 글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차영배가 방언을 성령세례와 연결시키지 않는 것을 볼 때, 그의 성령론은 오순절주의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봅니다.

이처럼 한국교회 성령론 논쟁의 핵심에는 성령의 은사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은사의 지속성 문제를 허용할지 여부에 따라 성령세례에 대한 정의가 또한 명백히 달라지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김길성은 1930년대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박윤선의 신학적 고민에 대해서 소개하였습니다. 당시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학교의 노선은 워필드의 주장을 따라 은사중지론의 입장이었는데, 박윤선이 한국에 돌아와 보니 목회적 상황은 방언, 신유 등 성령의 은사적 현상들이 지배적이었기에 그는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김길성, “우리 시대를 위한 개혁주의 구원론”, 「성령과 교회」, 104-5).

성결교회의 경우, 성결론에 대한 주제는 성결교회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모아지는 분야이지만, 그러나 특히 방언에 관해서는 적극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성결교회의 대표적 목회자이자 신학자 중 한 사람인 김응조는 성령세례가 신자에게 성결은 물론이요 또한 능력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방언에 대해서는 초대교회에만 주신 일시적인 특별한 은사라고 보아 이를 거부하였습니다(김응조, 「성서대강해」, 요한복음-로마서, X:201). 이처럼 성결교회는 방언 문제에 대해 전통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 왔습니다. 한 예를 들면, 1960년대 당시 전국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던 방언 문제에 대한 성결교신학교(현 성결대학교) 교수단의 “방언에 대한 해명서”가 발표되었습니다: “우리 예수교성결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하신 말씀으로 믿으며, 또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체험적 신앙으로 고조하는 성결교파요, 방언파나 진동파나 입신파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한국 성결교회의 성결운동은 오순절운동과는 달리, 성령의 역사의 결정적인 요소가 방언, 신유, 입신과 같은 은사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변화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 시기에는 크게 나누어 세 가지 흐름의 성령론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을 소개드렸습니다. 그 첫째는 오순절운동이고, 둘째는 장로교회 계통의 성령운동이고, 그리고 셋째는 성결파 계통의 성령운동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방언 문제와 관련하여 이 시대를 가장 특징 지워 준 것은 오순절운동이며, 나머지 두 가지 성령론은 오순절운동에 대한 반동(反動)으로서 한국 신학계에 정식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교단이나 성결 교단에서는 방언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거의 없었던 데 반해, 장로교 쪽에서는 내부적으로 첨예한 신학적 대립과 논쟁이 있었던 것이 눈에 띕니다. 그 이유는 장로교 계통에서 차영배, 안영복 등이 비록 방언을 성령세례의 직접적 증거라고 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중생과 구분되는 성령세례의 은혜를 언급함으로 인해 정통 개혁주의신학자들로부터 오순절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었고, 이것이 곧 방언과 관련된 성령세례 논쟁의 출발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