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가지에서 두 교회를 찾아냈습니다. 하나는 가톨릭교회의 성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복음 교회의 예배당이었습니다. 성당에는 많은 신도들이 성당 문밖 마당에서 성황을 이루며 가톨릭교회의 독특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근처에서 복음교회를 찾지 못했더라면 아마 나는 성당에서 하얀 옷을 입은 선남선녀들과 보냈을 것입니다.

마싸와 복음교회를 찾아갔을 때, 아직 예배 시작(9시) 전이어서 마테우스 담임목사에게 잠시 내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 외계에서 나타난 것 같은 깡마르게 여위고 초라한 내 행색과 자전거를 번갈아보면서 그는 종이쪽지에 뭔가를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마싸와 복음교회는 주일 예배 참석자가 20여명 안팎의 조그마한 동동체였습니다. 그날은 종려주일로 특별한 날인데 교인 수가 적었고 그 흔한 예배 순서지도 없었습니다.

50대 초반인 마테우스 목사는 설교 중에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지 교인들이 이따금씩 머리를 쳐들고 나를 쳐다보곤 했습니다. 예배가 끝났는데 다과 시간이나 친교 시간이 없어서였는지 몇몇 되지 않은 교인들은 뿔뿔히 흩어져 제각기 귀가를 했습니다. 예배 후에 나는 교회 바로 맞은편에 있는 사택으로 초대받아 마테우스 목사 가족으로부터 융숭한 식사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침 겸 점심 식사였습니다. 마테우스 목사는 에리트리아의 개신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침체 상태에 있는 몇 가지 요인을 나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첫째는 에리트리아 사회의 빈곤한 경제 생활에서 비릇된 교인들의 헌금 헌납의 부진 탓이었습니다. 둘째는 성직자 또는 교역자들의 영적 지도력과 소명감의 결여 탓이었습니다. 셋째는 일반 교인들의 안일하고 구태의연한 신앙생활 탓이었습니다. 에리트리아 개신교는 에리트리아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을 받아 성령의 역사니 말씀의 은사 등에 대해 특별히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었습니다. 헤어질 때 내가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 신분임을 알면서도 마테우스 목사는 내 손을 꼭 붙들며 이렇게 거듭 간청했습니다.

“형제님, 앞으로 3년 후인 2006년 쯤에 에리트리아를 한번 더 방문해 주실 수 있겠지요? 오셔서 여러 교회에서 사나흘 간 부흥회나 성령 세미나 같은 영성 집회를 인도해 주십시오. 저희 에리트리아 교회는 영적 눈이 멀고 영적 귀가 막힌 신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훌륭한 한국인 평신도 선교사님들을 필요로 합니다. 꼭 보내주십시오. 기도하며 기다리겠습니다.”

마음이 약한 나는 유구무언이었습니다. 나는 주변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성직자도 아니요, 교역자도 아니지 않는가! 무력한 내 자신 하나도 주체하지 못하는 몸인데 남을 어떻게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영적인 절망 가운데 휩싸여 있을 때, 성령의 뜨거운 바람이 내 등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마테우스 목사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엇비스듬히 외면하고 있는데 그의 음성이 또 들려왔습니다.

“그동안 온전한 통역을 위해 영어도 열심히 배워두겠습니다. 제가 못하면 제 아들 녀석이라도 시키겠습니다. 약속하지요, 형제님.”

그 순간 나는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하지요”라고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것은 내 입을 통한 성령의 응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마테우스 목사님과 순례자의 대화와 약속을 확증이라도 하듯 바로 옆 성당에서는 종려주일 12시 미사의 종이 귀를 따갑도록 울리고 있었습니다.

평화의 순례자 안리 강덕치(E-mail: dckang21@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