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일 토요일 아침입니다. 순례자는 일주일간 정들었던 아스마라를 뒤에 두고 페달을 밟았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시원하고 맑은 공기 탓이었을까, 이 이상적인 환경 도시에 반해버린 순례자는 그냥 눌러앉아 살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습니다.

해발 2,347미터의 아스마라에서 해발 10미터의 마싸와로 가는 115km, 3백리 길은 계속 내리막 길입니다. 산허리를 돌고 도는 구절양장의 U자형 커브 길입니다. 페달을 굴리지 않아도 자전거는 저절로 굴러갑니다. 그러나 브레이크와 핸들을 조심스레 조정하지 않으면 눈 깜짝하는 순간에 자전거와 함께 수백 길의 낭떠러지로 곤두박질하기 십상입니다. 용기 있고 담대한 자전거 여행자가 반나절이면 달릴 수 있는 거리를 순례자는 한나절에 걸려 달렸습니다. 왜냐하면 겁 많은 토끼가 거북이 걸음으로 달린 탓도 있지만, 도중에 빈번히 쉬면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첫 마을 세그리니(Sheghrini)에서는 길가 콩크리트 방벽에 앉아 개와 함께 놀고 있는 청소년들을 만났습니다. 소년들의 황갈색 털빛의 개는 잡견이었습니다. 순례자가 서울 흑석동 한강변 마을에 가난하게 살았던 젊은 시절, 출퇴근 때면 어김없이 주인을 꼬리치며 큰길가 대문까지 배웅하고 마중 나왔던, 그 정들었던 개를 집 이사 때문에 보신탕용으로 팔아야만 했을 때, 팔려가던 날 어린 여고생 누이동생을 슬픔에 젖어 눈물짓게 했었던 그 누렁개(황구)를 닮은 개였습니다.

조금 달리다가 입장료가 필요하지 않은 울타리 없는 동물원 숲에서 놀고 있는 ‘겔라다 바분’이라 불리는 비비들을 만났습니다. 테리어처럼 털이 길고 가슴이 빨간 비비는 에티오피아의 고유종 원숭이입니다.

아스마라에서 25km 쯤 되는 네파시트(Nefasit) 근처 도로에서는 라이딩 훈련을 하고 있는 일단의 사이클링 선수들을 만났습니다. 에리트레아는 사이클링과 마라톤의 나라입니다. 언젠가 국제 무대에서 우승할 날을 기약하면서 에리트레아 선수들은 피나는 훈련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2월에 개최되는 ‘에리트레아 사이클링 대회’(Giro d'Eritrea)는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체육 행사입니다.

한참 달리다가 쉬지 않아도 될 곳에서 지프차로 순찰 중이던 유엔군에 속한 네 사람의 인도 군인들을 만났습니다. 비전시(非戰時) 중의 군무가 무척 지루해서인지 그들 편에서 나를 붙들고 이야기하기를 더 즐겨했습니다. 그들과 나 사이의 대화는 종교와 평화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평화 유지군으로 파견되어 와있는 네 군인 중 두 사람은 힌두교 신자이고, 다른 두 사람은 각기 크리스천과 모슬렘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가 서로 다른 자기들 사이에 백퍼센트 평화와 전우애(戰友愛)의 끈으로 묶여져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평화의 전사’라고 칭송하니까, 그들은 나를 ‘평화의 성자’라고 추켜세웠습니다. 핍절한 검은 대륙의 오지에서 낯선 아시아인들이 우연히 만나 흔치 않은 평화를 이야기 하다니, 그것은 가슴 뿌듯한 일이었습니다.

다음날 순례자는 에리트레아의 제1의 항구 도시 마싸와에서 종려 주일을 맞았습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어딘가에 있을 주님의 교회를 무작정 찾아 나섰습니다. 홍해 연안에 자리 잡고 있는 마싸와는 에리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입니다. 사람들 입에서 ‘홍해의 진주’라 불리는 마싸와는 고대에 이집트와 그리스와의 무역 중심지로 번성했습니다. 7세기에 사라센에게 정복되었고 10세기에 모슬렘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마싸와는 16세기에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건축술이 빼어난 건물들은 이탈리아 식민의 부흥기였던 19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들입니다. 불행하게도 독립 전쟁 때 에티오피아의 전략 표적이었던 마싸와는 도시가 대부분 크게 파괴되었습니다. 대다수의 건물들이 아직도 전쟁의 상흔(傷痕)을 간직하고 있지만 도시는 여전히 사해동포주의적인 항구 도시로서의 독특한 매력을 풍기고 있습니다.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던 45년(1961년) 전까지만 해도 한창 번영했던 8만 인구의 마싸와는 오늘날 주민수가 3만5천으로 현격하게 떨어졌습니다. 1990년 패퇴하고 있던 에티오피아 군인들은 도시를 철수할 때 시중 은행의 돈을 모조리 약탈했으며, 에티오피아 공군은 10개월간 공중 폭격으로 도시를 거의 풍지박산으로 만들었습니다. 역사적인 옛 건물들이 잿더미로 변한 것입니다.

평화의 순례자 안리 강덕치(E-mail: dckang21@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