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는 소년에게 다가가 그를 말없이 끌어안았습니다. 내가 소년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무슨 말로 소년을 위로 하고, 무슨 말로 소년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소년에게 행한 포옹은 한 떠돌이 순례자의 순간적인 사해동포주의적 사랑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신 주님의 긍휼과 은총의 포옹이었습니다.

호텔을 떠나려고 짐을 챙기고 있던 손님 아저씨의 손이 자신의 어깨와 목에 따뜻함으로 와 닿자 소년은 처음에 어리둥절해 하다가 마침내 그 진의(眞意)를 깨닫고 얼굴에 다행스러움과 기쁨의 화색이 붉게 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순례자가 아스마라에 도착했을 때 버스 터미널에서는 거리의 소년들을 통하여, 그리고 호텔에서는 소년 가장을 통하여 이와 같이 크리스천이 행하여야 할 사역을 친히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순례자는 지부티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지부티 대사관에 가려고 아스마라의 도심지를 찾아
나섰다가 아스마라를 동서로 관통하는 넓은 가로수 길로 접어들었는데, 그것은 검푸른 야자수 잎이 흐늘지게 늘어져 있는 ‘해방로’라 불리는 하르네트 로(Harnet Avenue)입니다. 오늘날 약 11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스마라는 12세기에 아켈레 구자이(Akele Guzay) 지역에서 올라온 유목민이 정착해서 세워진 도시입니다. 초기에 수자원이 풍부한 이 높은 고원지대에 네 마을이 세워졌는데, 오늘날 아스마라는 '아르바테 아스마레'(네 마을)에서 따온 지명입니다. 이 도시는 중세기 때부터 활발한 대상 무역의 중심지와 상업 도시로 번영했으며 19세기에 에리트레아가 이탈리아의 식민지였을 당시(1897년)에 수도가 되었습니다.

자카란다라 불리는 능소화과의 수목과 빨강 입사귀 꽃의 ‘부겐빌라’에 취한 순례자는 아스마라의 중심가를 요정에 홀린듯 정신없이 걸었습니다. 큰 행길과 뒷골목과 크고 작은 가게들은 이탈리아 식민지 시대에 심어놓은 지중해 분위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아스마라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아르 데코(Art Deco)라 불리는 이탈리아식 건축물들이 여행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줍니다.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에서든, 거리를 걸으며 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 앞에 오고가는 행인들을 멍청하게 바라보는 것도 즐거운 일입니다. 아스마라 거리에서 한 두 쌍의 남자들이 어깨를 마주 대고 밀착 보행하는 것을 보고 나는 에리트레아에도 호모 섹스가 있는 것으로 지레짐작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남자 친구가 만날 때, 그들은 서로 손바닥을 치고 이어서 서로 자기 어깨를 상대방의 오른쪽 어깨에 기대는데 그것을 두 번 또는 세 번 반복합니다. 친구들 간의 이런 인사법을 ‘전사의 인사’라고 부릅니다. 수백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어느 종족의 관습이었는데 에티오피아와의 전쟁 이후에 빈번한 인사법이 되었다고 합니다.

 에리트레아의 여자들의 걸음걸이는 여성적인 유연한 점이 없어 보입니다. 여자 축구 선수처럼 어딘가 뻗대고 투박합니다. 30년간 에티오피아와의 오랜 전쟁이 낳은 흔적이라고 합니다. 아스마라에서는 전시에 군인으로 복무했던 여자들이 낡은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에리트레아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언론 자유의 부재가 그것입니다. 수년간 언론인들과 싸우고 있는 이사야스 아페웨르키 수상은 많은 독립적인 신문들을 폐간시키고 아무런 혐의도 없는 자유 언론의 기자들을 투옥했습니다. 국가 공용어인 티그리니아어판과 영문판의 두 국영 신문만이 이 나라의 유일한 신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위성 텔레비전에 대해서는 시청 자유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위성 안테나를 구입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기 위해 BBC, CNN, Euronews 등의 다이얼을 돌릴 수 있습니다.

평화의 순례자 안리 강덕치(E-mail: dckang21@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