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지난 1년간 ‘배본철 교수의 세계순회 성령사역’을 연재했던 본지는 배본철 교수(성결대)의 새 글 ‘배본철 교수의 성령론 Q & A’를 매주 화요일 연재합니다. ‘방언이란 무엇인가’ ‘예언이란 무엇인가’ ‘직통계시가 가능한가’ 등 성령론에 관한 많은 궁금증들을 질문(Q)과 대답(A) 형식으로 속시원히 풀어줄 예정입니다.

Q) 어떤 사람은 진실한 크리스천이 아닌 것 같은데도 방언을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무언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데 그것이 방언인지 자기도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진짜 방언도 있고 거짓된 방언도 있다고 말하는데, 이 점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A) 이제까지 저는 방언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을 보여주는 오순절주의의 시각을 주로 다루었습니다. 이제는 방언에 대한 합리주의적 비판의 시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전 ‘인문학적 성서 읽기’라는 한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방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정용섭 목사의 글을 접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방언,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으로 한 기독교 웹사이트에 시리즈로 게재한 글의 요지를 정리한 것입니다. 필자가 특히 그의 글을 인용하는 것은, 그의 글이 합리주의적 시각에서 방언에 대해 의문시하는 관점을 비교적 잘 정리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정 목사는 방언을 외국어로 나오는 방언과 일반적인 방언 현상으로 분류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외국어로 나오는 방언은 그가 전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또 이러한 사실이 있다 해도 심층심리학이나 언어학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방언 현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열정과 그걸 소리로 만들어내야 할 구강기능이 그걸 따라가지 못할 경우에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 그런 게 가장 일반적인 방언 현상이다.”「정용섭, ‘방언, 무엇이 문제인가?(1)’」

그의 방언에 대한 정의를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방언이란 인간 내면 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상한 소리로서, 우리가 기쁠 때 또는 슬플 때 웃음소리나 울음소리가 튀어나오듯이, 기도나 찬양 중에 내면의 격한 열정이나 감동으로 인해 튀어나오는, 언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소리의 일종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방언이란 더 이상 기독교인들만의 경험도 아니고,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간에 누구든지 경험할 수 있는 매우 일반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어서 정 목사는 성서가 방언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도 방언이 있었으며, 바울도 그런 경험이 많았고, 사도행전이 보도하는 예루살렘 원시 공동체에서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로 방언 현상이 크게 일어났다는 건 분명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의 방언에 대한 성경 해석을 바르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도대체 방언에 관한 성서의 보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방언에 대해 언급한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이런 신비한 현상들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것 같다. 바울이 거기서 말하려는 요점은 모든 은사가 교회의 덕을 위해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강조점은 방언이 신앙의 본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덕을 심하게 훼손할 개연성이 높다는 사실에 대한 경계다. 한국교회는 왜 신약성서도 아주 일부에서만, 그것도 소극적으로, 실제로는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방언을, 더구나 예수는 전혀 언급하지도 않으신 방언을 그렇게 중요한 신앙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왜곡이다.”「정용섭, ‘방언, 무엇이 문제인가?(1)’」

고린도전서의 방언 언급에 대한 그의 해석은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무질서하게 은사가 실행되고 있던 점에 대한 바울의 우려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방언 자체를 인간 내면에서 솟아나와 구강구조를 통해서 튀어나오는 이상한 소리로 보고 있는 그의 견해를 따른다면 정말 이런 소리는 우려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누가 교회의 예배와 모임 중에 의미 없는 웃음과 울음소리들이 가득차길 바라겠습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기독교 신앙에서 방언과 통역의 신학적, 혹은 신앙적, 더 나아가서 선교적 의미가 매우 크다고 언급한 것입니다. 좀 전에 방언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그가 이제는 매우 적극적으로 방언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발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방언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과 그 진술은 근본적으로 방언이다. 사도신경만 보더라도 그렇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방언이나 마찬가지로 들릴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말도 역시 방언이다.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먹고 마신다는 성만찬의 신앙도 역시 방언일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에게 낯설 수밖에 없는 우리의 언어는 결국 방언이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대로 방언은 통역되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바실레이아 투 데우(하나님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통역되어야 한다. 칭의와 성화와 종말은 통역되어야 한다. 이 통역이 곧 신학이고 설교다.”「정용섭, ‘방언, 무엇이 문제인가?(2)’」
 

자, 이제 우리는 지금 여기서 그가 말하는 방언이란, 전에 그가 언급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이상한 소리’로서의 방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방언에 대한 재해석은 ‘인문주의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우화적(allegorical)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는 방언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보고, 통역이란 이를 해석하는 신학과 설교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록 흥미로운 개념의 전환이긴 하지만, 과연 그가 성서에서 크리스천들이 경험했던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의미를 올바르게 전달한 것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또 그는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 대한 설명에서, 무슨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성서의 진술을 오늘날 실제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거기에 열거된 다른 현상인 방언, 뱀, 병자 치유도 역시 이와 비슷한 차원의 사건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구절을 오늘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듯이, 성서가 표현하고 있는 모든 사건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다고 보면서, 방언도 역시 이런 범주에 속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정용섭, ‘방언, 무엇이 문제인가?(3)’」

이제 정용섭 목사는 방언에 대한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나름대로의 해결점을 찾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첫째, 방언이란 인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이상한 소리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의미 없는 이상한 소리는 교회에서 절제되고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재해석된 의미에서의 방언이란 세상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의 신앙고백과 진술이다. 그러니 설교와 신학을 통해 방언이 통역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정 목사가 말하는 방언에 대한 의미가 전술한 이 두 가지라면,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누구도 교회의 예배나 기도 중에 의미 없는 소리를 지르기를 원하지 않을 겁니다. 또 그 누구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설교나 신학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을 겁니다. 아마 크리스천이라면 이런 두 가지 점에 모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면 방언에 대한 논의는 잘 정리된 것일까요?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위의 두 가지 정의 중 어느 것도 신약성서 시대에 크리스천들이 경험한 방언 현상을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성령 받은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방언은 단지 ‘인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이상한 소리’였던가요?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의 설교와 신학을 방언이라 했던가요? 이 둘 중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와는 달리 성서는 방언의 정의에 대해서 성령의 역사와 관계된 심오한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마가복음의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에 대한 설명에서 ‘성서가 표현하고 있는 모든 사건을 그대로 따라 갈 수 없다’고 한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방언을 포함한 성서에 나오는 사건을 다 믿기가 어렵다는 말인지 아니면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합리적으로 재해석 되어야 한다는 말인지 궁금하기까지 합니다. 저는 방언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에 많은 고민을 표현한 정 목사의 노고에 한편으로 감사를 드리면서, 앞으로 한국교회가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방언에 대한 정론이 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이런 문제점들에 대한 답변을 명확히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