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에 ‘라은성 교수의 교회사 맥 잡기’를 연재 중인 라은성 교수가 교회사 속 오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무심코 흘려 보낸 오늘, 그 옛날 누군가는 예수를 전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기도 했을텐데요. 1천년 전 오늘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7월 26일>

노예무역을 억제하기 위해 1807년 노예무역령이 발표된 후 영국 하원은 노예 제도를 철폐했습니다. 노예 신분에 반대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윌리엄 윌버퍼스(7월 29일 사망)의 노력으로 인해 이 일이 이뤄졌습니다. 이 사실을 접한 윌버퍼스는 “하나님! 오늘을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3일 후에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1833년 오늘 노예제도 철폐령(Slavery Abolition Act)이 실시됐는데 이 법은 1998년 다시 한 번 헌법으로 확언되었습니다.

<7월 27일>

916년 오늘은 오크리드의 클레멘트(Clement of Ohrid)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날입니다. 클레멘트는 ‘슬라브의 사도들’인 시릴과 메토디우스(Cyril and Methodius)의 신실한 5명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섯 명은 오크리드의 클레멘트(Clement of Ohrid, 약 840~916), 나훔(Nahum), 고라츠드(Gorazd), 앙겔라리우스(Angelarius), 그리고 사바(Sava) 등입니다. 이들 중 클레멘트가 가장 교육적으로 탁월하여 5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시편, 찬트, 도덕적 작품들, 그리고 교회 예식서 등이었습니다. 그의 스승 시릴과 메토디우스의 생애도 썼습니다. 성경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7월 28일>

1881년 오늘 미국 장로교 신학자 존 그레샴 메이천(John Gresham Machen, 1881년 7월 28일~1937년 1월 1일)이 미국 메릴랜드의 볼티모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근본주의를 이끌었던 대표적 20세기 미국 장로교 신학자로 유명합니다. 독일 자유주의자들의 영향 하에 있던 현대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전통적 칼빈주의의 보수적 신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전엔 자유주의자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살아계신다는 확신과 성경이 진실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그는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가 되었습니다.

<7월 29일>

1833년 오늘 영국의 노예폐지론자 윌리엄 윌버퍼스(William Wilberforce, 1759년 8월 24일~1833년 7월 29일)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노예폐지를 위해 힘쓰다가 이 제도가 폐지된 후 3일 만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7월 30일>

오늘은 종교재판자 마르부르크의 콘라드(Conrad of Marburg, 1233년 7월 30일)가 살해당한 날입니다. “콘라드가 죽었다! 종교재판장이 죽었다!” 이런 말이 독일 전역에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독일인들의 증오심을 한 몸에 받던 콘라드가 죽은 것입니다.

<7월 31일>

1889년 오늘은 스코틀랜드의 언약파(Covernter) 지도자며 부흥사 호라티우스 보나(Horatius Bonar, 1808년 12월 19일~1889년 7월 31일)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날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 무디의 복음주의적 목회를 변호했던 그는 구령에 대한 열정을 가진 참된 부흥사들 중 가장 학식을 많이 가진 자였습니다. 1843년 ‘스코틀랜드 교회 분열’(Great Disruption) 논쟁에서 호라티우스는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를 떠났던 복음적 목회자들 및 장로들과 뜻을 같이 했습니다. 이후 그는 그들과 함께 ‘자유교회’(Free Church)를 세웠습니다. 그동안 그는 찬송시들을 써서 1845년에 출간했습니다.

<8월 1일>

177년 오늘은 로마제국의 축제일로 프랑스 리용에 수많은 인파들이 이날 로마제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곤 기독교인들의 고문을 즐겁게 관람하곤 했습니다. 고올지방의 총독은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면서 자신의 애국심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검투사들, 권투선수들, 그리고 레슬링 선수들을 고용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을 고문하도록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