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어령 박사.
여섯 살 난 꼬마가 굴렁쇠를 굴리며 보리밭길을 달린다. 태양이 눈부신 대낮. 달리던 꼬마는 굴렁쇠를 멈추고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자신이 왜 우는지, 무엇이 이토록 슬픈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 꼬마는 70이 넘은 할아버지가 됐다. 평생 하나님 없이 홀로 살아온 인생. 그가 세례를 받는다. 눈물이 흘렀다. 문득 어릴 적 굴렁쇠를 굴리다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그 때 왜 울었는지.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을 만나 흘린 눈물에서 그는 답을 찾았다.

이어령 박사가 11일 오후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 여해문화공간에서 열린 여해포럼 강연자로 나섰다. 이날 포럼 주제는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Between & Beyond). 대화문화아케데미(전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고(故) 여해 강원용 목사와 오랜 세월 활동해온 이 박사가 고인과의 추억을 말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고인과의 추억보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 그리고 영성을 말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것이 곧 여해를 말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 박사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다”는, 다소 도전적인 이 말부터 꺼냈다. 불과 3년 전 회심한 그가 그보다 더 오래 살아온 이 땅의 교회에 쓴소리를 한다. 오만함인가, 아니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확신 때문인가.

“달라고만 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외로우실 것 같다”

“세상엔 대통령도 있고 여당도, 야당도 있다. 기업도 있으며 언론도 있다. 왜 교회가 그런 곳엘 가는가. 무엇을 하려고. 교회는 그런 것을 하는 곳이 아니다. 왜 문둥병을 고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그런 예수님만 보는가. 왜 돌들을 빵으로 만들지 않으신, 빵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하셨던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가. 왜 교회는 말씀으로 빵을 구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박사를 가리켜 시대의 ‘지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는 이날 ‘지성의 한계’를 역설했다. “우주의 원리를 깨닫고 별들의 무덤을 예언했던 지성 중의 지성, 만물의 이치를 단 하나의 공식 안에 가둘 수 있었던 아인슈타인도 ‘죽음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저 ‘내가 좋아하는 모짜르트의 음악을 더이상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는 이 박사의 목소리가 더욱 격앙됐다.

“세례를 받을 때 눈물을 흘렸다. 이제껏 그 누구 앞에서도 운 적이 없었는데……. 인간의 나약함, 끝없이 지성을 탐구해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 딸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손가락 한 마디만큼도 도움을 줄 수 없는 그런 나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았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였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그 분이 보였다. 어린 시절, 굴렁쇠를 굴리다 주저앉아 울었던 나 자신도 보였다. 그 땐 왜 우는지 몰랐는데,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고 교회조차 그런 그에게 세상을 물었다고 그는 말했다. “왜 내게 세상의 것들을 묻는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가서 찾으면 될 것을. 왜 영성에 대해 묻지 않는가” 지성의 한계를 누구보다 깊이 깨달은 그는 여전히 지성을 갈구하며 영성을 놓치는 이 시대가, 무엇보다 오늘의 교회가 안타까운 듯했다.

이 박사는 이날 많은 것들을 토해냈다. 비록 인생의 끝에 하나님을 만났으나,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 신앙의 진지함을 선물한 것 같았다. 음미할만한 그의 말을 덧붙인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필요를 구한다. 이것을 달라 저것을 달라 한다. 혹 하나님께 나의 이것을 드리겠다 저것을 드리겠다 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하나님께 무엇이 필요하냐 묻는 이가 있을까? 하나님이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수백, 수천 개로 쪼개질 것이다. 저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사람에겐 이런 의의 하나님, 또 저 사람에겐 저런 의의 하나님이 된다. 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존재하는 단 하나의 하나님은,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다. 사랑은 결코 둘이 될 수 없다. 그에게나 나에게나 사랑은 동일하다. 오늘 주제가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인데 서로 다른 양극을 뛰어 넘는 것은 사랑과 생명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