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60년 전 이 땅은 전쟁으로 피흘리고 있었다. 4백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전 세계 16개국이 참전한 한국전쟁. 이 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초토화됐다. 슬픔, 분노, 그리움, 아픔, 공포, 두려움, 광기, 비극이 대한민국을 사로잡았다.

눈앞에서 가족이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하고,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에 떠밀려 범인(凡人)들도 서로를 죽고 죽일 수 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점에서 더욱 비참했다. 게다가 한국측 사망자의 85%는 대부분 ‘민간인’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71명 학도병 실화를 그린 영화 <포화속으로>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은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영화 <포화속으로>는 고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에서 비롯됐다. 그는 1950년 8월 11일 포항전투에서 숨졌으며, 사망 당시 중학교 3학년, 열여섯살이었다. 아직 여드름이 채가시지 않은 솜털 보송보송한 열여섯 소년에게도 전쟁의 비극은 비켜가지 않았다.

전쟁이 무엇이고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하루 세 끼 배불리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친구나 형제를 따라서, 혹은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싸우다 죽은 친구를 위해, 어머니가 해주시던 묵은지 넣은 김치찌개를 먹고 싶어하던 평범한 학생들 71명은 학사모를 쓴 채, 교복을 입고 대한민국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지지선을 지키기 위해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직 어머니의 품이 그리웠던 어린 학생들은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에 휩쓸려 죽음의 전장터에 나섰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을까. 당시 전쟁은 군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힘없는 학생, 여성, 농민들도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 고향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한떨기 꽃처럼 희생됐다.

전투로 시작해 전투장면으로 끝나는 ‘전쟁블록버스터’ <포화속으로>는 피튀기는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영화의 3분의 1정도는 대규모 폭파장면이다. 화약사용량은 2톤이 넘게 들었으며 인민군, 한국군, 민간인 등 엑스트라만 하루에 3백명이 넘게 투입됐다. 피분장에 소모된 분장용 피의 양은 드럼통으로 몇 통이 넘는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북한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해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진격한다. 남한군은 연합군과 함께 낙동강 전투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고, 전선의 최전방인 포항은 총 한번 잡아본적 없는 71명의 학도병이 지키게 된다. 학도병 중 유일하게 전투에 따라가 본 적 있다는 이유로 장범(최승현)이 중대장으로 임명된다. 소년원에 끌려가는 대신 전쟁터에 자원한 갑조(권상우) 무리는 대놓고 장범을 무시하며 갈등을 부추긴다.

영덕을 초토화시킨 북한군 진격대장 박무랑(차승원)이 이끄는 인민군 766유격대는 낙동강으로 향하라는 당의 지시를 무시하고 비밀리에 포항으로 방향을 튼다. 박무랑 부대는 삽시간에 포항에 입성하고, 국군사령부가 있던 포항여중에 남아있던 71명의 소년들은 인민군 부대에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학사모를 쓰고 교복을 입고 죽음의 전쟁에 뛰어들었던 그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지 않은지…….

영화는 이데올로기는 철저히 배제하고 휴머니즘의 렌즈로 전쟁을 들여다본다. 영화 속 북한군 대장 박무랑은 어린 학생들로 이뤄진 학도병들에게 항복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등 관용을 베풀고, 장범은 북한군 어린이가 생포되자 갑조에게 “그를 죽이지 말라”고 소리친다. 머리에 뿔 달린 괴물인줄만 알았던 인민군이 ‘오마니’를 부르며 죽어가는 모습에 장범은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가 생각나 눈물을 흘린다.

수적으로 북한군에 비해 열세였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학도병들은 모두 장렬히 전사한다. 놀라운 것은 이들 71명의 희생으로 인해 북한군의 남침을 11시간 지연시켜 시간을 벌게 되고, 20-30만명의 포항시민이 피난해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며 최근 일어났던 천안함사건에서 순직한 장병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으며, 형제였고, 친구였다.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군입대를 자원한 효자였으며, 대학에 입학해 수학교수를 꿈꾸던 이제 갓 스물살 넘은 청년이었고, 성격이 좋고 바다와 책을 사랑하던 청년이었으며, 3개월 된 딸과 아내를 두고 있던 가장이자 아버지였다. 그들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고, 가족을 사랑했지만 결국 바다 아래서 순직했다.

6.25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 시대 전쟁은 잊혀져가고 있다. 최근 한국갤럽 조사 결과 6.25가 언제 일어났는지 모르는 사람이 13~19세에선 62.9%, 20대에선 58.2%였고,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각각 37.1%와 41.8%였다는 결과가 나왔다. 조사에선 또 “6.25전쟁 책임이 가장 큰 나라는 북한”이라고 답한 사람이 전체의 43.9%뿐이었다. 그나마 10대는 38%, 20대는 36%에 그쳤다. 10대의 18%, 20대의 25%는 “남북한 모두 책임이 있다”고 했다.

좀 더 앞서 2008년 행정안전부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국 중고등학생 1천여명 응답자 가운데 6.25 전쟁 발발 연도와 북한의 남침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경우는 각각 42%와 48%에 지나지 않았고, 청소년 절반 이상이 6.25 전쟁 발발 연도나 남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전쟁은 기독교인들과도 무관하지 않다. 전쟁 당시, 피난하지 않고 사역지에 머물렀던 선교사들과교역자들은 인민군에 체포돼 납북됐다. 전남 영광군의 야월교회와 염산교회, 충남 논산의 병촌교회 등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 일부 지역 교회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좌익에 의해 집단학살 당한 적도 있었다. 북한이 여전히 기독교 박해국가 리스트 1위에 올라서는 것을 본다면, 이 땅의 평화와 자유는 결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자유와도 맞물린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와 자유(혹은 신앙의 자유)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수의 전후세대 현대인들, 특히 청소년들의 기억 속에서 한국전쟁은 잊혀져 가고 있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존재조차 희미하던 71명의 학도병들 처럼 말이다.

아이돌가수 빅뱅의 멤버 T.O.P 최승현 군은 학도병 대장 장범 역할을 맡은 소감을 전하며 “아이돌가수로서 6.25 전쟁이 지난 지금 잊혀져 가는 기억들에 대해서 어린 친구들과 젊은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 영광”이라고 밝혔다.

전쟁이라는 비극적 소재가 ‘전쟁블록버스터’라는 용어로 엔터테인먼트에 사용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영화를 보며 단순히 그냥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뼈아픈 희생으로 얻어진 자유와 평화의 참된 가치를 깨닫는 데 이른다면 족하다. 오는 16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