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영옥 박사.
이른바 페트라셰프스키 사건과 연루된 도스또옙스끼의 죄명은 그가 범죄적 음모에 가담해 희랍정교회 및 최고 권력에 대한 불손한 표현에 가득 찬 사신을 유포하고 자가 인쇄로 반정부 문서를 유포하려 한 죄목이었다. 그와 함께 체포됐던 사람들은 군법회의 심리를 거쳐 모두 판결을 받는다. 기록에 의하면 극심한 고문으로 발광을 일으켜 정신이상자가 된 사람과 미결수와 유형이 각각 한 명씩이었고, 징역 4년이 4명, 6년이 1명,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 도스또옙스끼와 페트라셰프스키를 포함해 모두 15명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도스또옙스끼의 공술서에는 그가 사형 언도를 받을만한 어떤 죄명도 찾을 수 없다. 페트라셰프스키 사상에 깊이 관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개인적 친분도 깊지 않았다. 다음 글을 보자.

‘금요모임에서는 갖가지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나는 의견의 일치가 된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모임엔 어떤 의견 일치도, 하나의 경향도, 장차 향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공통의 목적 같은 것도 없었다. 어느 문제를 두고 세 사람 이상이 같은 의견을 갖는 예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항상 토론이 치열했고 견해의 대립이 있었다. 나도 이러한 토론에 종종 참가하였다.’

그 토론에 참가해 도스또옙스끼는 무슨 말을 하였을까. 그의 죄상은 ‘자유주의적인 언사를 스스럼없이 취하고 <베린스키와 고골리의 왕복 서한>이라는 문학 논문을 낭송했다’고 돼 있다. 고골리는 러시아의 소설가이며 극작가다.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로 인간 내면에 도사린 악을 풍자적으로 그려내는 데 뛰어났다. 그는 1846년 <친구와의 왕복서한 발췌>를 출간하였는데 그 내용이 농노제 옹호였기 때문에 벨린스키등 많은 문학가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베린스키와 고골리의 왕복서한>이란 논문은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도스또옙스끼는 금요모임 토론에 참가하고 논문을 낭송한 이유를 작가적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악덕과 인생의 어두운 면을 은폐함으로서 그 존재를 독자의 눈으로부터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작가란 어두운 면까지 제시하고 자신이 독자에 대해 불성실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밝은 빛깔만으론 그림이 되지않는다. 어두운 면 없이 밝은 면이 나타날 까닭이 없다. 악덕이 없으면 선은 없고, 악덕과 선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 인생이다. 작가는 그것을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침묵하는 사상은 생명이 없다.”

그리고 도스또옙스끼는 반문한다.

“내가 하고싶은 말을 했다고 해서 내가 범법자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페트라셰프스키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진짜 이유를 알게 만든다. 즉 그는 ‘자유’를 위해, 그리고 ‘자유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에 체포됐다.

도스또옙스끼의 문학 세계에서 자유라는 개념은 중요하고 또 난해하다. 나중에 그의 작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겠지만 우선 여기서는 페트라셰프스키사건과 연계해 파악할 필요가 있다. 당시 도스또옙스끼는 이 두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가령 보다 나은 것을 바라는 마음이 자유주의라 한다면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유주의자다. 그것은 조국에의 사랑을 지니고 있고 한번도 조국을 배신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있고 조국에 대해 선을 요구할 권리가있는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나는 자유주의자다.”

그리고 당국의 어떤 결정도 그를 위협할 수 없다고 말하고 그에 대응하는 자신의 태도를 밝힌다.

“보다 나은 것을 바랐을 뿐, 미움과 분노로 어떤 혁명적 변화를 시도한 것도 아닌데 나의 자유주의 자체가 형벌의 이유가 돠다니… 그러나 나는 지금 어떤 죄명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상의 어떤 밀고도 내게서 무엇 하나 빼앗을 수 없다. 결단코 나를 나 이외의 다른 나로 바꿀 수 없다. 나는 진정한 의미의 리버럴리스트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침묵하지 않았고, 침묵치 않은 자유만이 한 인간을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이게 한다. 도스토옙스끼는 그것을 지성의 힘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힘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직한 신앙이었음을 그의 문학이 말해주고 있다.

[송영옥박사 기독문학세계 지난 연재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