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기독교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렇게 묻는 데는 ‘일라이’가 주는 생경함 때문이다. 다소 과격한 액션신에다 덴젤 워싱턴(일라이 역), 게리 올드만(카네기 역) 같은 유명 헐리우드 배우의 출연 등 기존 기독교 영화가 좀처럼 입지 않았던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소재와 스토리 전개, 배우들의 대사만 놓고 보면 ‘일라이’는 분명 기독교 영화다.

영화 ‘2012’나 ‘더 로드’ 등 종말을 소재로 최근 개봉했던 영화들이 지구 파괴와 같은 종말적 현상이나 그 안에서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쳤다면, ‘일라이’는 종말(종교적 의미이기보다 환경오염 등으로 인한 일종의 재앙) 후 남겨진 인간들의 ‘공백’을 응시한다. 그동안 좇아 왔던 물질적 풍요가 다 사라져버렸고, 아무것도 남지 않아, 이젠 무엇을 바라며 살아야 할지. 지금까지 인간들을 채워왔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 빠져나가 텅 비어 버린 그 마음을 카메라에 담았다.

▲다른 모든 인간들은 방황하지만 일라이, 그에겐 가야 할 길이 있다.

그 공백을 안은 채 폐허 속에서 생존해 가는 인간들을 모아 작은 마을을 일군 카네기. 그는 비록 돈과 지식으로 그들을 유혹했지만 더 큰 세계의 재건을 위해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한 일라이. 이 사실을 알아차린 카네기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의 추격을 시작한다.

쫓는 자는 있으나 쫓기는 자는 없다. 일라이는 카네기로부터 달아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걸었고, 또 걸어야 할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간혹 불의를 보더라도 “가던 길을 가자.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라고 되뇌면서. 무엇을 향해, 두려움도 불안도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그는 또 걷고 걷는 것일까. 삶의 의미를 잃어버려 방황하는 사람들과 야망에 눈이 먼 카네기를 뒤로한 채 일라이는 홀로 전진하고 있다. 유일하게 공백이 없다.

카네기가 빼앗으려 하고 일라이가 지키려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성경이다. 인류에 종말이 닥치자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인간들은 하나님을 원망해 성경을 모두 불살라 버린다. 하지만 단 한 권의 성경이 남았고 그것을 얻게 된 일라이는 그 어떤 사명감 하나로 서쪽을 향한다. 카네기는 한때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목숨까지 버리며 지키려 한 것이 바로 성경이었음을 떠올리고 그것을 다시 손에 넣으려 한다. 이처럼 영화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성경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전부 사라졌다는 상상을 통해 웅변하고 있다.

이 영화가 특별한 것은 기독교의 가치를 간접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포장 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사실 간접적인 방법을 선택한 영화는 무수히 많다. 여기에 사랑과 믿음 등 보편적 가치를 전달하는 영화들도 기독교 영화의 범주에 포함시키자는 일부의 의견까지 반영하면, 그 숫자는 더욱 커진다. 그러나 직접적인 방법을 사용한 영화는 많지 않았고, 그것들 대부분이 ‘마이너’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직접적 전달은 통하지 않으니 아예 만들지 말자는 주장도 있다. 이런 가운데 정공법을 선택한 영화 ‘일라이’. 평가야 영화가 개봉된 후 판가름 나겠지만, 영화의 표현력과 배우들의 연기, 이야기의 밀도와 연출력, 특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면에 있어 기자는 분명 특별한 점을 느꼈다. 물론 헐리우드의 기술력과 자금력이 작용했고, 기독교 문화가 바탕을 이룬 미국의 영화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또 한 번의 도전적 영화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주인공 일라이가 극 중 상대와 손을 잡고 기도하는 장면

성경의 가치를 말하고, 주인공은 “하나님의 나의 목자시니…”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한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등의 성경 구절을 반복하고, 가슴을 울리는 기도가, ‘아멘’이라는 단어가 세계적 배우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고, 국내 기독교 단체가 아닌 정통 대중 배급사가 홍보에 나서는, 어느 면에서나 기존 기독교 영화와 차별성을 보이는 영화 ‘일라이’이다. 다만 극 초반 잔인한 액션신이 등장하는데, 기독교를 전면에 내세운 도전적 헐리우드 영화인 점을 감안하면 그 정돈 눈감아 줘도 무방할 듯. 자칫 달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보게 될지 모르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선과 악의 대결에서 악으로 등장하는 카네기 역시 성경의 위력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는 점이다. 바리새인들이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을 귀신들이 먼저 알아봤다는 성경의 그 아이러니가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그 어느 교회에선가 성경이 이리저리 흩어져 방치되고 있었던 옛 기억과 함께. 영화의 홍보사(영화인)가 교회에서 시사회를 열 것을 계획하고 있다 하니, 여느 기독교 영화와는 다른 ‘일라이’에 교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진다. 오는 15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