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영옥 박사.
생의 전환점, 페트라셰프스키 사건

1849년 12월 22일, 아침 9시 세묘노프광장, 처형대 위에서는 한 집행관이 총살형 선고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말뚝에는 40년대 청년 인텔리겐치야를 대표하는 비밀써클 금요회 지도자, 페트라셰프스키와 몸벨리, 고리예프 등이 묶이고 머리에는 자루 같은 것이 씌어졌다. 둘째 줄에도 많은 동지들이 묶인 채 서 있고 앞에는 일대 사수들이 그들의 가슴을 겨누어 총을 들고 ‘쏘앗’ 하는 구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방아쇠를 잡아당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이 대열 둘째 줄에서 총살형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페테르스부르크 문집에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하여 일약 문단의 혜성으로 떠오른 도스토옙스끼였다. 그의 성명과 죄상을 읽는 소리는 다음과 같았다.

‘퇴역 공병 중위 표돌 도스또옙스끼(27세)는 범죄적 음모에 가담하여 희랍 정교회 및 최고 권력에 대한 불손한 표현에 가득찬 사신을 유포하고 자가 인쇄에 의해 반정부 문서를 유포하려한 죄목에 비춰 총살형에 처한다’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은 도스토옙스끼의 출생, 죽음과 함께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닌다. 만약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그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도스또옙스끼와 상당히 다른 작가 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천재성과 문학적 정열은 결국 그를 문학의 거장으로 역사에 남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 대한 작가로서의 면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의 신실한 믿음을 후세의 우리가 알 길이 없을지도 모른다. 죽음과 직면한 순간 복음이 어떻게 그의 피를 뛰게 하고 살을 숨쉬게 하였는지를. 그가 체포된 것은 4월 23일이었다. 그의 회고록에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2일이 아니라 그땐 벌써 23일이 되어 있었는데 새벽 4시경 그리고리에프의 집에서 돌아왔다. 침대에 눕자마자 곧 잠이 들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비몽사몽간에 느꼈다. 벨 소리가 들렸다. 무엇일까. 겨우 눈을 떠 보니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소리가 있었다.

“일어나십시오”

보니 거리의 경찰관 아니면 무슨 특명을 띤 사람들인것 같았다. 멋진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말을 한 것은 그 수염의 사나이가 아니고 육군 중령의 견장을 단 청복의 사나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고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명령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명령이었다. 도스또옙스끼는 청복의 병졸이 입구 쪽에도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도스또옙스끼가 옷을 입으려 일어서면서 난처해 하자 “기다려 줄테니까 옷을 입으십시오” 라고 중령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상냥하게 들렸다. 옷을 입는 동안 병사들은 서재와 책상 위의 책을 뒤졌고 온통 방안을 들쑤시면서 찾은 원고며 낙서한 종이 쪽지까지 모두 책과 함께 끄나풀로 묶었다. 한 경찰관이 도스또옙스끼의 담뱃대로 난로 속의 꺼진 불씨를 뒤지며 재를 휘져었고 또 한 사람은 의자를 놓고 난로 위를 샅샅히 훑었다. 아무리 뒤져도 대단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책상 위에는 낡은 동전 하나가 있었는데 경찰관은 그 동전을 의심의 눈초리로 응시하더니 중령에게 턱짓을 했다. 중령은 그 동전을 서류뭉치 속에 넣었다. 위조지폐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도스또옙스끼는 그렇게 연행되어 옥살이를 하고 그해 12월 세묘노프광장의 처형대 위에 서있는 것이다.

[송영옥박사 기독문학세계 지난 연재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