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배본철 교수(성결대, 교회사)는 지난 한 해 필리핀, 아프리카, 영국 등 세계를 돌며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스스로 이 순회를 ‘세계순회 성령사역’이라 이름 붙였죠. 그는 이 순회를 통해 “신념과 주장을 좀 더 힘 있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배 교수가 가졌던 신념과 주장은 무엇일까요. “나의 거듭난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은혜”라고 고백하는 배 교수가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글에 녹여 본지에 기고했습니다. 질풍노도의 기간을 지나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을 좇아 세계를 순회했던 모든 과정을 매주 화요일 소개합니다. 배 교수와 함께 성령이 운행하는 세계로 다시 떠나봅시다.

시카고에서 LA까지

짧았지만 그러나 깊은 사랑의 정을 안고 우리는 카멜을 떠났다. 다음 행선지는 뉴욕 주 빙햄턴(Binghamton)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계시는 동료 교수인 최 목사님을 찾아가는 길이다. 카멜은 인디아나 주이고 최 교수가 계신 곳은 뉴욕 주다.

우리는 일단 뉴저지까지 비행기로 와서 거기서 차를 빌렸다. 웨이곤(wagon) 스타일의 탱크처럼 아주 튼튼하고 큰 차를 즐기게 되었다. 아예 네비게이션(navigation)까지 빌려서 신경 쓰지 않고 편히 목적지까지 갖다오기로 했다. 차를 빌리는 과정에서 상당히 비싸게 빌린 것 같았지만, 우리는 이를 경험미숙으로 돌리고 돈 아까워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마침내 당도한 최 교수님 댁. 아드님이 이 근처의 대학을 다니기에, 안식년을 이용해서 모처럼 한 가족이 모여 살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최 교수님은 평소에는 연구교수 자격으로 근처에 있는 대학 연구실을 이용하여 연구하고, 주일에는 역시 가까운 한인교회를 열심히 섬기면서 안식년을 보내고 계셨다. 얼마나 열심히 주의 일을 하셨는지, 최 교수님이 나중에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올 때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매우 섭섭해 하셨단다. 우리는 차 빌리느라고 비용이 많이 들긴 했지만, 그리고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이렇게 방문하길 정말 잘했다고 느꼈다.

뉴욕 주에서 돌아와 뉴저지 주에 있는 한 교회에서 성령세미나와 설교를 맡게 되었다. 나는 ‘제자입니까?’, ‘성령으로 사십니까?’, ‘부흥을 원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으며,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합당한 영적 무장을 다짐하는 시간이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그 교회 해군 장성 출신의 장로님께서 허드슨 강변에 위치한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사관학교를 구경 시켜 주셨다.

우리 부부 생애의 최고의 숙소를 제공 받았다는 얘기도 빼놓고 싶지 않다. 그 교회를 다니시는 정 집사님 댁인데, 너무도 황홀한 숲속의 별장이었다. 이곳에서 그동안 밀려있던 논문 한편을 완전히 끝낼 수 있는 축복도 받았다. 집사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어떻게 갚을 길이 없다. 다만 집사님 내외분께서 걱정하며 기도하고 있는 따님의 문제를 상담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집사님의 따님과 상담하는 가운데, 나는 좀 더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주로 영어를 사용해 가면서 대화를 하였다. 왜냐하면 이 자매가 한국어를 아주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도가 좀 떨어지고, 영어는 아주 자유롭게 하는 아가씨였기 때문이다. 이 자매는 훌륭한 학문과 함께 장래가 유망한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는 직장을 아주 포기하고 어떤 기도훈련단체에 완전히 헌신하여 스탭으로 섬길 것에 대해 마음을 쏟고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 부모들은 따님을 설득하여 만류시키기를 원했으나, 따님의 마음이 이미 그쪽으로 다 기울어 있었던 것이다.

나와 자매는 주님의 부르심의 다양함에 대해 함께 대화를 하면서, 자매의 경우에는 주님께서 그 단체에 스탭으로 헌신하기로 부르시기보다는, 그 단체를 통해 훈련을 받고 나와 교회 사역을 중심으로 섬기면서 탤런트를 따라 하나님 나라를 섬기기 원하신다고 하는 방향으로 매듭을 지을 수 있었다. 누구든지 어떤 단체를 통해 은혜를 받고 보면 그 단체를 위해 섬기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정말 그 단체의 사역을 위해서 나를 부르셨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분별할 일이다.

그러고 보니 군에 간 아들 명지 생각이 난다. 우리가 안식년 사역으로 나오기 바로 몇 주 전에 명지는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아들을 군대 보내기 며칠 전 나는 식탁에서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명지야, 그동안 너는 우리와 함께 하나님을 경험해 왔다. 이젠 하나님을 너 홀로 경험해야 할 때다. 나와 엄마는 이제 일 년 동안 해외의 선교지들을 순회하며 다닐 것이다. 사실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 우린 모른다. 그렇지만 우린 남겨 놓은 너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다. 네가 군대에서도 주님과 잘 동행할 줄 믿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들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진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항상 아빠가 하시던 말씀인데, 오늘은 좀 다르게 들리네?”

며칠 후. 우리는 아들을 논산 연무대에 입소시키러 갔다.

“잘 다녀올께요. 아빠 엄마도 잘 다녀오세요.”

애써 웃음을 지으며 태연한 듯이 말하는 아들 앞에 나는 힘껏 악수를 해주었다. 아내는 아들의 얼굴을 차마 쳐다보지 못한다. 아들은 연병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부모들이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치는 가운데 아내도 여지없이 흐느껴 운다. 나는 아내의 들먹이는 어깨를 품어주면서 생각했다.

‘당연히 애처롭겠지. 아들이 첫 휴가를 나와도 만나줄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 있었다. 장병들의 대열이 마지막으로 연병장을 두 바퀴 돌고는 저 건너편 막사 쪽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인데, 그 열 지어 걸어가는 수백 명의 무리 가운데 아들과 마지막 눈빛이 마주친 것이다. 만일 그 교감이 없었더라면 우린 안식년 내내 아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웃음을 보았다. 아들이 손을 들어 우리 쪽을 향해 저으면서 싱긋 웃어주는 그 눈동자를! 그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저는 아무 염려 마세요. 전 잘 할 겁니다. 엄마와 아빠, 잘 다녀오세요. 사랑합니다!’

그리고는 몇 주 후에 우리 부부는 해외로 나온 것이다. 아들의 그 웃음을 우리는 1년 동안 가슴에 곱게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첫 휴가 나왔을 때는 부모도 없고 집도 없어서, 마치 고아와 같이 처량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의 믿음을 인정하고 있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가능한 대로 속히 우리의 자녀가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신앙으로 세워지도록 하는 것, 난 그것이 경건한 부모로서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믿음의 유산이라 생각한다.

뉴져지주를 떠나 아틀란타에 도착했다. 이 지역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라고 하는 정 목사님이 담임하는 아틀란타연합장로교회로 향했다. 이분은 성령운동에 대해 관심이 높으신 분이신지라, 몇 해 전 나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올려주신 것이 이번 만남의 계기가 되었다. 얼굴로는 처음 뵙는 목사님이셨지만, 목사님은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겸손함과 함께 남을 진심으로 칭찬해주는 여유로움을 함께 지닌 분이었다. 그런가 하면 사모님은 소녀 같은 가냘픔을 보이는 외모를 지녔지만, 기도의 무릎으로 사는 영적인 전사셨다.

도착해서 먼저 금요셀그룹리더모임에서 ‘전인적 성령사역’과 ‘성령과 동행하는 사역자’라고 하는 제목으로 두 번에 걸쳐 강의하였다. 모두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리더들이 되기를 다짐하는 뜨거운 기도의 시간도 가졌다. 주일에는 2,3,4부 예배의 설교를 하였다.

이 교회는 세대별 문화 차이를 고려하여, 주일 드리는 네 번의 예배 중 세 번의 예배가 다른 분위기로 진행이 된다. 첫 번째는 전통 예배(traditional worship), 두 번째는 현대 예배(contemporary worship), 그리고 세 번째는 최신 예배(modern worship)이다. 정 목사님은 나에게 비록 같은 내용의 설교일지라도 각각의 예배 스타일에 맞추어 말씀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나는 이러한 주문을 매우 흥미롭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첫 번째 예배는 넥타이에 정장을 하고, 두 번째 예배는 윗저고리를 벗고, 그리고 세 번째 예배를 위해서는 청바지와 핑크색 티셔츠를 준비해 갔다. 각각의 예배 분위기에 걸 맞는 설교자의 의상을 나름대로 고안해 본 것이다.

그런데 이 핑크색 티셔츠로 말할 것 같으면 꽤 사연이 있다. 몇 년 전인가 한국에서 여름방학 때 어느 청소년 부흥단체에서 수련회 강사로 나를 불렀다. 나는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좀 젊은 복장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 아내와 함께 고른 티셔츠가 바로 핑크색 티셔츠였다. 그런데 사다가 옷장 속에 모셔두고는 막상 날이 다가오는데 이것을 입고 갈지 양복 정장을 입고 갈지 판단이 안 섰다. 왜냐하면 혹시 그 자리에 나이 지긋하신 목사님들이 함께 오신다면 나의 복장을 편한 눈으로 봐주실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정장을 하고 갔다 왔다. 그러고 보니 이 핑크색 티셔츠는 여전히 얌전하게 옷장에 걸려 있었다.

그러다가 그해 겨울방학 필리핀 일로일로 지역으로 집중강의와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다. 그때 부흥회 때 많은 현지인 사역자들이 참석했다. 첫날 저녁 나는 내가 ‘부흥 셔츠’를 입고 왔노라고 말했다. 핑크빛 부흥 셔츠. 그런데 그날 밤 핑크빛 색상의 짙은 은혜가 임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다음 날 수많은 참석자들이 저마다 붉은 색 셔츠들을 단체로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집회를 주선한 감각 있으신 오 선교사 사모님께서 그들을 위해 단체로 부흥 셔츠를 구입하여 입히셨단다. 그때부터 나는 청소년들 대상으로 부흥회를 인도할 때면 종종 이 핑크색 셔츠를 입곤 한다.

아틀란타연합장로교회에서 그날 세 번의 예배 때 성령께서 큰 은혜를 부어주셨다. 담임목사님이 성령님과 깊이 동행하시는 분이라 그런지, 역시 교인들이 성령의 역사에 대해 뜨겁게 열려 있었다. 그리고 이 교회가 아프리카와 중남미 지역의 선교를 위해 크게 헌신하는 교회라는 것을 알고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렇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특히 중남미 지역의 선교를 힘 있게 담당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이 교회가 하나의 좋은 모델을 보이고 있는 점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렸다.

아틀란타를 떠나 LA에 도착했다. 정 목사님이 반갑게 마중 나오셨다. 정 목사님은 특히 한국과 미국을 잇는 선교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일을 위해 추진하고 계셨다. 며칠 동안의 숙소는 오직예수초대교회를 담임하는 강 목사님 댁에서 우리를 맞아주셨다. 그리고 이 교회에서 금요성령집회와 주일 말씀을 전했다. 이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특히 십대 아이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많이 임했다.

LA에는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위해 온 수많은 한국인 청소년들이 있다. 이 교회 담임 강 목사님은 특히 십대 청소년들에 대한 전도에 가슴이 뜨거운 분이셔서, 우리는 이 분의 사역을 통해 앞으로 LA 지역의 한인 청소년들에게 복음이 힘 있게 전해지기를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