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억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한성형무소에 구금되어 옥살리를 하고 있는 동안 기일 선교사가 번역했던 [천로역정]을 읽고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윤치호를 감옥에서 만나 함께 예수를 믿고 출옥 후 종교교회에서 만나 사돈이 되었다.

일찍이 기독교 문화를 접했던 남궁억은 강원도 양양 군수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민중을 일깨워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그 깊은 산골에서 군수로 있으면서 날마다 독립이 빨리 오기를 그곳 민중들과 함께 열심히 노력을 하였다. 군민들이 그를 환영하는 만찬에서 즉석에서 작사한 독립의 노래를 불러 모든 군민들을 놀라게 했다.

설악산 돌을 날라 독립 기초 다져 놓고 / 청초호 자유수를 영 너머로 실어 넘겨 / 민주의 자유강산을 이루놓고 보리라

남궁억은 독립협회사건으로 영오의 몸이 되었던 그 정신을 살려 1896년 독립신문이 창간될 때 영문판 편집인이 됐다. 이미 기독교의 문화를 접했던 그는 영어만이 민족을 개화시키는 길이란 것을 인식하고 일찍이 영어를 습득하여 그 결과로 배화학당 교사, 상동청년야학원 원장 자리에 앉게 되었다. 1918년 낙향하여 현재 무궁화로 널리 알려진 한서 마을로 자리를 옮기고 3. 1 운동의 정당성을 알렸다. 다시 이곳에 학교와 교회당을 설립하기 위해서 자신의 재산 일부를 투자하여 모곡학교와 모곡교회(현 한서교회)를 설립하였다.

민족정신운동을 함양하기 위해서 모곡마을에 무궁화 꽃을 심는 운동을 전개하다가 결국 71세의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찰에 의해 구속되는 비극을 만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모곡학교와 한서교회 주위에 널려있는 그 수많은 무궁화 꽃이 수난을 당하면서 무궁화 묘포장까지 싸그리 짓밟힘을 당하고 말았다. 병보석으로 1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1939년 77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괴목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

그는 죽어서까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백성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한서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현재호 목사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개화기 때부터 광복 이후까지 시대에 따라 무궁화로 특히 일제시대에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무궁화처럼 자존심을 갖고 하나님의 뜻대로 독립할 때까지 인내하며 견디라는 뜻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한서교회의 현해호 목사는 교회 앞과 한서역사기념관 앞 할 것 없이 땅이 비어만 있으면 무궁화로 가득 채우려 한다. 그의 이러한 행동에는 한서 남궁억의 정신을 이어 가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있다. 특별히 한서교회의 십자가탑은 한국교회에서 제일 높은 것도 무궁화의 꽃을 영원히 빛내기 위해서 세워진 의미라고 생각된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