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은 1897년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에서 출생하였으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멀고 먼 정주 오산학당에 진학을 하였다. 그곳에서 설립자인 이승훈 장로와 교장 조만식 장로의 영향을 받으면서 애국하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오산학당을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1년간 교육을 받은 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고생을 하다가 자퇴원을 제출하고 고향 웅천에서 웅천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으로 무장을 하였다. 이때 김익두 목사가 웅천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중 뜻하지 않게 안질의 병은 물러가버렸다.

하나님께 약속했던 그 길을 가기 위해서 경남성경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주기철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를 안수를 받은 후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다시 경남 문창교회의 청빙을 받고 문창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마산 뒷산에 올라가 수도 없이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 우리 민족에게 언제 독립을 주실 것입니까!”

그런데 그의 부인이 알 수 없는 병으로 1933년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먼저 삶을 마감했다. “목사님, 먼 훗날 천국에서 만납시다, 꼭 한 가지 부탁의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의신여학교 교사로 계신 오정모 선생을 부인으로 맞이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해서 주기철 목사는 2년이 진 난 1935년 오정모 교사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됐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은사인 조만식 장로가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마산역전까지 나가 맞이하여 문창교회 사택으로 안내를 하였다. “목사님, 저희 교회에서 전 교인들이 만장일치로 목사님을 초빙하기로 결의를 하였습니다. 여기 청빙 서류 봉투를 놓고 갈 터니 그렇게 아시고 기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은사의 부탁을 거절도 못하고 할 수 없이 평소에 다닌 바위위에서 기도를 하였다. 이때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기철아, 걱정하지 말고 산정현교회가서 양을 바르게 잘 키우라”
이러한 음성을 들었던 주기철 목사는 곧 조만식 장로에게 전보를 쳤다. 이 소식에 조만식 장로는 어찌 할 줄을 모르고 몇 번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1936년 평양에 도착한 주기철 목사는 그 유명한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38년 9월 10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주기철 목사는 깜짝 놀라 몇 번이고 자신의 귀를 만져보기도 하였다. 나중에 같은 경남노회에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가 모든 임원과 각 지역 노회장을 인솔하여 평양 신사를 참배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때 주기철 목사는 무슨 의미가 있는 줄을 알고 산정현교회 강단에서 말씀을 통해 총회 신사참배 결의에 대해서 단호하게 “이 일은 우상승배입니다. 우리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철저하게 반대를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러한 이야기가 평양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결국 평양노회에서도 반대 발언이 문제가 되어 고등계 형사에 의해 체포되어 평양경찰서에 구속되고 말았다.

이미 신사참배는 우상이라는 설교를 했던 관계로 평양경찰서를 다녀온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일사각오(一死覺悟)를 실천해가는 참된 목자였다. 이 일로 1939년 10월에는 세번째로 구속이 되었다. 잠시 풀려나왔지만 그 해 12월 19일 또 투옥되었다. 이때 평양노회가 주기철 목사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 임시노회를 개회하고 주기철 목사의 치리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 평양결찰서 고등계주임 마쯔모도 등 고등계 형사들이 노회에 참석을 하였다. 이 임시노회에서 주기철 목사를 면직하고 이인식 목사를 당회장으로 임명을 하였다. 이때 당시의 노회장이었던 최지화 목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이인식 목사가 노회의 결의에 의해 설교하기 위해서 강단으로 올라오려고 하던 그 시점에, 양재연 집사가 강단을 먼저 점령하고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찬양을 불렀다. 결국 이들은 예배를 인도 못하고 물러가게 됐다. 이날 예배 방해죄로 산정현교회 교인 13명이 평양경찰서에 연행되어 구속되는 일까지 발생하게 됐다. 결국 산정현교회는 일제의 경찰의 힘에 의해 폐쇄되었다.

주기철 목사가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어 수감하고 있을 때 그이 부인 오정모가 면회를 갖다가 돌아온 일이 종종 있었다. 1944년 4월 마지막 면회시 주기철 목사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대화를 하였다.

“여보, 그 따끈한 숭늉 한 그릇 마시고 십 소”
“목사님, 무슨 이야기를 하세요, 지금 조선 교회 교인들이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순교를 하셔야 조선교회가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 면회를 하고 왔던 오정모 부인은 1944년 5월 21일 평양형무소에서 그만 조선교회의 마지막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옥사하고 말았다. 비록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2006년 새로 나온 21세기 찬송가 158장은 그가 즐겨 부르던 노래가 찬송가 실려 있음을 한국교회가 그를 그만큼 사모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가사 1절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언덕위에 비치누나 / 연약하시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 머리에 쓴 가시관과 몸에 걸친 붉은 옷에 / 피 흘리며 걸어가신 영문밖의 길이라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