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배본철 교수(성결대, 교회사)는 지난 한 해 필리핀, 아프리카, 영국 등 세계를 돌며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스스로 이 순회를 ‘세계순회 성령사역’이라 이름 붙였죠. 그는 이 순회를 통해 “신념과 주장을 좀 더 힘 있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배 교수가 가졌던 신념과 주장은 무엇일까요. “나의 거듭난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은혜”라고 고백하는 배 교수가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글에 녹여 본지에 기고했습니다. 질풍노도의 기간을 지나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을 좇아 세계를 순회했던 모든 과정을 매주 화요일 소개합니다. 배 교수와 함께 성령이 운행하는 세계로 다시 떠나봅시다.

천국 영성

포틀랜드에 와서 무엇보다도 모처럼의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마음이 매우 즐거웠다. 그리고 비록 안식년 동안에 많은 책을 접한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 하고 싶은 말이 넘쳐나는 것을 느낀다. 내가 이렇게 현장에서 발로 뛰며 얻은 지식과 경험을 안식년이 끝난 이후 한평생 제자들과 함께 나눌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해외에 나와 다니다보니 더 많이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팔복의 영성(마 5:3-10)으로 한국교회를 축복해 주시기를 계속 간구하였다. 나는 이 팔복의 영성을 천국 영성(heavenly spirituality)라고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이 여덟 가지 경건의 덕목이야말로 천국을 경험하는 영혼들이 누리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와 사회 속에 파괴적인 비난과 협잡과 모함과 온갖 부정적인 영향의 언행 대신 진정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천국 영성이 가득 넘치기를, 그래서 우리 조국의 교회를 다시 한 번 크게 일으켜 세우셔서 세계복음화의 완수를 위해 값지게 헌신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3-10

심령이 가난한 자(poor in spirit)는 복이 있다고 했다.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다(3절). 가난함의 영성!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채우실 수 있다고 하는 절박한 가난함의 고백이 백년 전 한국교회에는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부흥이 저들에게 임했던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가난함의 영성이 다시 한 번 한국교회에 임하게 하옵소서.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4절). 오늘날 한국교회의 깨어있지 못함과 자만함과 죄악을 놓고 애통하며 가슴 치는 자를 많이많이 일으켜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 한국교회가 이 시대 온 세계에 가득 찬 죄악을 놓고 애통하며 울 줄 아는 선지자적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5절). 투기하고 비난하고 살육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축복을 받는 한국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를 것이다(6절). 한국교회가 세상의 사라질 헛것과 정욕과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에 머무르지 않게 하옵소서. 진정 영원히 만족되고 배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뜻과 의를(마 6:33) 간절히 찾는 한국교회 되게 하옵소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7절). 남의 눈의 티끌 보다는 자기 눈의 들보를 인식하고 겸비할 줄 아는 한국교회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마음으로 남의 허물을 긍휼히 여기며 모든 죄를 품을 줄 아는 사랑(벧전 4:8)이 한국교회에 넘치게 하옵소서.

마음이 청결한 자(pure in heart)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 했다(8절).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성결, 거룩함이 절실히 한국교회에 요청된다. 말뿐인 사랑, 혀로만 하는 사랑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요일 3:18)을 행하여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받게 하옵소서(요 13:35).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받을 것이다(9절). 모든 사람들이 비난과 협잡, 모함과 살육에는 발걸음이 빠르지만, 화평케 하는 일을 위해서는 좀처럼 나서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진정한 용기가 있다면 그것은 화평을 위해 자신을 바칠 줄 아는 용기이다. 빛이 다가오면 어둠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주님, 이 시대와 세계를 위한 평화의 섬김이(peacemaker)로 한국교회를 일으켜 주옵소서.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10절)에게 천국이 있다. 천국의 의가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이 아닌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핍박 받음을 마다하지 않는 교회, 그런 순교적 영성(martyrdom spirituality)의 한국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오직 그 길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여 주님의 지상명령을 이루는 제자 공동체로서의 한국교회가 되게 하옵소서(마 28:18-20)!

캐나다

미국 포틀랜드에서 캐나다 밴쿠버(Vancouver, BC)로 향했다. 밴쿠버에 꼭 들리기를 부탁하셨던 이 목사님의 요청을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포틀랜드에서 우리가 다음에 들릴 곳인 캐나다 리자이나(Regina)로 직행하게 되면 비행기 삯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설령 단 한 분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사역을 진심으로 열망하는 곳에 우리는 간다.’고 기도해 왔기 때문에, 여행경비라든가 여행의 피곤함 등은 이유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곳에 언제나 주님이 준비하신 아름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배워 알고 있었다.

이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을 때 거기에 성령의 강한 임재가 있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삶’에 대해 내가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의 감동으로 십대 청소년들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되었다. 모든 십대 아이들이 강단 앞에 나와 무릎 꿇고 기도를 받았다. 기도를 받고 난 후 어떤 남자 아이가 내게 다가와 진지하게 묻는다.

“목사님. 나에 대해서 우리 목사님이 말씀 하셨지요? 나 때문에 밴쿠버에 오셨지요?” 나는 이 아이의 눈망울이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밴쿠버에 머물 동안 우리 부부는 이 목사님의 아름다운 가정을 통해 은혜를 많이 받았다. 네 자녀를 둔 이 목사님의 가정은 독일 신학자 본훼퍼(Ditrich Bonhoeffer)의 ‘성도의 공동생활’에 대한 교훈을 생각나게 해주는 경건이 있었다. 더군다나 주일 예배를 위해 예배장소로 빌린 학교 강당에서 온 가족이 합심하여 예배 준비를 위해 세팅을 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고 은혜스러웠다.

이 목사님 곁에는 함께 동역하시는 김 목사님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목회하시다가 얼마 전 이곳으로 오셨다. 김 목사님은 한국에서 끈질긴 기도와 성도에 대한 사랑과 양육을 바탕으로 훌륭하게 목회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열악한 목회 상황 속에서 비록 성도 수는 얼마 안 되지만 오랜 세월을 잘도 인내하면서 사역하셨다고 본다. 그런데 한국의 교회를 정리하고 이곳에 들어오셔서 새롭게 사역의 기반을 내리고 있다. 내 생각에는, 그동안 기도와 말씀의 경건으로 철저히 무장한 김 목사님을 통해 이곳에서 많은 열매가 맺혀질 것을 기대하였다. 밴쿠버와 같은 관광도시에는 김 목사님 같은 철저한 영성의 사역자가 꼭 필요하다고 본다.

밴쿠버를 떠나기 전 그곳에서 공부하거나 사역하는 성결대학교 동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 모임에서 함께 식사하면서 오랜 만에 동문의 정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초대는 내가 했는데, 식사를 하고 나니 이곳 동문 지방회에서 식사비를 계산해 버렸다. 언제 갚을지도 모르는 사랑의 빚을 진 셈이 되었다. 내게 배운 제자들이 어느덧 목사가 되어 이곳에서도 여러 명이 사역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분이 내게 간절한 어조로 말한다.

“교수님. 저도 학생 때는 교수님이 매월 철야기도 시키는 것 솔직히 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 사역을 하다 보니 너무 너무 잘했다고 느낍니다. 교수님. 안식년 끝나고 학교에 돌아가시면 예전보다 더 빡세게 후배들 기도 시켜주십시오!”

이 한 마디가 내 마음에 큰 위로를 주었다. 사실 수년 간 학생들하고 학교에서 철야기도를 하면서 별별 일이 많았다. 철야기도 때마다 굉장한 은혜의 역사가 있었으나, 때로는 오해와 비난의 소리도 들어야 했다. 그래도 난 이러한 어려움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묵묵히 학생들과 함께 철야기도를 계속 해 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나의 확신 때문이다.

‘철야기도의 열매는 그 학생들이 졸업하고 목회와 선교 현장에 나가서 거두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신학교 커리큘럼이 학문에만 쏠리다 보니 신학생들에게는 실제적으로 나가서 사역할 수 있는 능력과 실천적 경험이 부족한 것이다. 신학교에서 기도훈련, 전도훈련, 생활훈련을 시키지 않으면 결국 학생들은 준비되지 못한 사역자로 교정을 나서게 되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나약한 영혼으로 거친 세파와 마귀의 궤계를 뚫고 복음을 외칠 수 있을 것인가? 커리큘럼에서 이러한 면을 충족시켜 줘야 하지만 여러 가지 교육 시스템의 여건상 그것이 부족하다면, 당연히 별도의 시간을 사용해서라도 제자들을 힘 있게 훈련시켜야 하지 않을까? 나는 신학교수로서 이러한 나의 신념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2003년 이후 학생들과 함께 매월 ‘능력철야기도회’를 가졌다. 매월 마지막 주 화요일 밤 10시에 시작해서 새벽 5시까지 총 일곱 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기도회다. 이 기도회에는 나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물론, 은혜 받으려고 모여든 여러 신학생들과 교회 청년들 그리고 이 기도회를 함께 섬기는 목사님 전도사님 내외분들이 참석한다. 수년간 지속된 철야기도회의 열매를 이렇게 해외에서도 제자들을 통해 볼 수 있어서 행복하고 보람 있었다.

밴쿠버를 떠나 리자이나에 도착했다. 지금은 이 학교가 캘거리(Calgary)로 옮겼지만, 전에 이곳에 캐나디안신학대학원(Canadian Theological Seminary)이 있었다. 90년대에 나는 이 학교에서 한동안 석사과정을 공부한 적이 있다. 그 후 이곳을 떠난 지 15년 만에 다시 밟는 공항은 새롭게 단장을 해서 그런지 아주 산뜻하게 보였다. 놀라운 것은, 그 당시에는 시골 같이 여겨지던 이곳이 매우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사방으로 뻗어가는 주택들과 많이 늘어난 한인들. 게다가 이젠 어엿한 한인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춘 몇몇 교회들. 전에 내가 있을 때에는 한인교회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15년 만에 조 집사와 임 집사님을 뵙게 되는 기쁨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청바지 가게를 하시면서 그동안 한국에서 온 신학교 유학생들의 대부 역할을 하면서 먹을 것도 잘 챙겨주시던 분들이다. 매주 금요일마다 유학생들이 그분 댁에 모여 기타 치며 찬양하면서 기쁨에 넘친 예배를 드리곤 했었다.

리자이나에 있는 어느 한인교회에서 한 주간 동안 말씀을 전하고 성도들을 격려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아내는 가정세미나를 인도하였다. 온 교회에 새로운 영적 활력이 경험되는 주간이었다. 이곳을 떠나기 전날, 이 교회를 담임하시는 최 목사님 부부와 우리는 함께 차를 나누며 호젓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최 목사님은 앞으로 자신의 사역에 대한 새로운 결단과 소망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우리 부부는 감격하면서,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보내실 때는, 주의 종을 굳게 세우고 격려하는 이 일에 주님의 통로가 되도록 우리를 보내셨다고 하는 사실을 새롭게 절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