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화성시 발안면 제암교회에서 29년째 시무하고 있는 강신범 목사는 아주 특별하다. 그가 이 교회에 부임할 때는 교인이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아 강신범 목사가 가족과 함께 이삿짐을 날랐다. 이유인즉 “이곳에 부임한 목사는 곧 또 이사를 갈텐데 나가서 무엇 합니까.”라는 것이었다. 이날부터 강 목사는 죽으면 죽으리라고 기도를 하였는데 교인은 6명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부임했을 때 권사인 전동례 할머니에게 교회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섰다. 그 할머니는 “목사님, 제 남편을 비롯해서 일본 헌병대에 의해서 사살된 이들의 시신을 아직 찾지 못하고 이렇게 늙어 버렸습니다.”라고 했다.

바로 이 말에 충격을 받았던 강신범 목사는 얼마 동안 하늘만 처다보고 다니면서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옳지, 내가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하고 성경책과 찬송가가 들어 있는 가방을 들고 상경하여 문화재청에 들어가 자신을 소개했다고 한다.

“저는 작은 애국자입니다. 청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이 말에 실무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어이 없다는 뜻이 그 사실을 청장에게 알렸다.
“어서오십시오. 제가 청장입니다”
“저는 화성군 발안면에 제암리에 있는 강신범 전도사라고 합니다.”

청장은 당돌한 그의 말에 매력을 느끼고 방문한 사실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제암리는 1919년 3일 1일 운동 때 23명이 교회 방화와 함께 학살을 당해, 유족들이 매일같이 23명의 시신을 발굴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화성군에서는 강신범 목사의 협력을 얻어 전동례 할머니가 알고 있는 그 지점을 찾아가 흙을 팠고, 결국 뼈만 앙상하게 모여 있는 유골이 발견되는 순간 유족들은 다시 땅을 치면서 슬퍼했다. 그 모습을 군 당국자와 인근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보게 되었다.

여기에 자신을 얻었던 강신범 목사는 제암리에서 학살당한 애국자들의 묘를 만드는 데 착안을 하고 전동례 권사를 앞세워 서울과, 화성군청을 드나들면서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던 중 23명의 애국자들의 시신이 묻혀 있는 땅을 파자 그 자리에서 그 앙상한 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자 정부와 군 당국에서 발벗고 나섰고, 지금은 제암교회 뒷산 한 자리에 시신을 묻어 그들의 유족들을 위로하고 국가의 체면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 역사적인 현장을 지휘했던 강신범 목사는 그의 이름이 일본에까지 알려져 일본 기독교계에서 1천만엔을 모금하고 사죄단이 제암리를 방문했다. 이 때 전동례 권사는 일본 목사 및 평신도 지도자들의 사죄를 다 받아주고, 일본 교계에서는 사죄하는 의미에서 제암교회를 신축하게 됐다. 이후 매년 일본에서 400여명이 방문하여 사죄를 하고 있으며, 이후 강신범 목사는 ‘3. 1운동과 제암교회’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 후 정부에서는 그냥 있을 수 없다 하여 일본인들이 지어준 건물을 헐어버리고 새롭게 교회당과 제암리 3.1운동 역사자료관을 신축하였다. 이 역사관 관리는 전적으로 정부에서 맡아 하고, 일대를 공원화하여 많은 시민들과 일본인들이 와서 과거의 모습을 보고 새롭게 미래를 전개하는 그 힘찬 소리가 제암리에 울려퍼지고 있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