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A씨(남·36)는 성격이 다소 소심하고 내성적이다. 그래서인지 낯을 많이 가리고 대인 관계도 원만한 편이 못 된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해 가끔 마음고생을 하기도 하는데, 어려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승락했다가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쉬는 날에도 밖엔 잘 나가지 않는다. 대개 집 안에서 온라인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 서핑을 즐긴다. 그 중에서도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에 특히 적극적이어서 가입한 카페만 수십여 개고, 최근엔 직접 낚시 관련 카페도 개설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그곳에서 서로의 생각들을 교류하는 것에 더 편안함을 느낀다.

사이버 세상에서의 A씨는 그야말로 거침이 없다. 평소 속에 담아두고 하지 못하던 말들을 속 시원히 꺼내놓고, 어디든 가보고 싶은 곳엘 가며,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해본다. 불만이 있어도 친구에게조차 한 마디 하지 못하는 A씨지만 이곳에선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 나이가 많은 사람 등 그 실체를 불문하고 날센 비판의 칼을 든다. 심지어 대통령에게까지도. 그의 온라인 닉네임은 ‘가면’이다.

이상의 A씨는 물론 가상의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의 인물이 현실에도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가할 사람이 있을까. 최근 여러 매체들을 통해 접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세계에서 인터넷 보급율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한국이 과연 그것을 자랑할 만한 처지인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할 정도다. 무법의 세상이라 할만큼 정화되지 않은 말들이 난무하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무자비의 세상이 바로 한국의 사이버 세상이다.

그 누가 악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나

한 유명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부적절한 말을 남긴 여대생이 네티즌들의 비난에 휩싸였다. 연애관을 말하는 자리에서 이성에 대한 그의 잘못된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이다. 논란이 일자 그는 자신이 다니는 학교 홈페이지 커뮤니티 사이트에 사과문을 게재하고 그 경솔함을 뉘우쳤다. 그는 이 사과문에서 “경솔하고 신중치 못했던 행동 때문에 너무나 많은 피해를 입고 분노를 느끼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했다.

이 사건에 오버랩되는 또 하나의 사건…, 혹시 기억하는가. 유명 아이돌그룹 2PM의 리더로 활약했던 재범 군은 그가 데뷔 이전에 썼던 글로 인해 가수 활동을 접고 한국을 떠났다. 당시 네티즌들은 무수한 비난의 글들을 인터넷에 올렸고, 일명 ‘악플’로 대변되는 그것들은 또한 무수한 언론매체에 뉴스거리가 되며 연일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그 후 재범 군이 그룹을 탈퇴하고 한국을 떠나기까지는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스타가 이렇게 빨리 빛을 빼앗길 줄 그 누가 알았을까.

네티즌들의 글이 무서운 힘을 발휘한 경우는 비단 이 두 사건만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몇몇 연예인들의 자살을 경험하면서 ‘악플’의 악영향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이제 수많은 연예인들과 정치인들을 비롯한 공인들은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이 악플과 직면해야 한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까지껏 인터넷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무심코 적은 글 그냥 넘겨버리면 그만이라고. 그러나 오늘날 인터넷에서 자유롭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며, 그까짓 글따위 그냥 넘겨버리기엔 인간이란 존재가 너무나 나약하다. 비난의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여대생의 발언을 비난하는 글. ‘자살’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해가며 그 비난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마치 작은 생선을 삶는 것처럼

여대생과 재범 군은 분명 잘못을 저질렀다. 아무리 사소한 실수라도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갈수록 선정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방송 문화의 정화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욱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 있어 그 지적의 정도는 지나칠 정도로 심했던 것 같다. 특히 재범 군의 경우 몇몇 인터넷 게시판에 차마 입을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인신공격성 ‘악플’들이 달렸었고, 이것은 삽시간에 사이트 이곳 저곳으로 옮겨지면서 마치 전국민적 저항에 부딪힌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당사자의 사과와 뉘우침은 한낱 변명에 불과했고, 재능있는 가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감정적 비난을 자제하자는 일부의 목소리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이었다.

재범 군의 소속사 대표였던 박진영 씨는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비난의 수준이 과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자살 서명 운동까지 있었을 정도였다”면서 “그런데 막상 재범 군이 미국으로 떠나고 나니 이제는 과장된 번역 때문이라며 큰 잘못이 아닌 것처럼 여론이 흘러갔다”고 했다. 한국인들의 냄비근성을 지적한 것이다.

약팽소선(若烹小鮮)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치대국약팽소선(治大國若烹小鮮)의 준말로,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즉, 무엇이든 자연스럽게 두면서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라는 의미인데, 지금의 사이버 세상에 처방이 될만한 교훈이 아닐까 한다. 생선을 삶을 때 빨리 익기를 기다리면서 뚜껑을 자주 열어보고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휘젓는다면 그 생선의 모양은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가상 속 가면이 현실 속 가면이 되다

오늘도 어김없이 A씨는 인터넷 게시판에 ‘악플’을 달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연예인을 비난하는 글이다. A씨는 그 연예인이 TV 화면 속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유치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그 연예인과 관련된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오면 어김없이 악플을 다는데, 반말은 기본이고 비속어도 서슴없이 사용한다.

그러던 어느날 모든 인터넷 닉네임의 실명을 공개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그 동안 ‘가면’이라는 닉네임으로 수십개의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해 있던 A씨는 하루아침에 그 가면을 벗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길을 가던 A씨. 맞은 편에서 한 연예인이 걸어오고 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악플을 달았던 바로 그 연예인. A씨는 가던 길을 멈추고 발걸음을 돌려 황급히 집으로 향한다. 그리곤 문을 잠그고 창밖을 살핀다. 사람들이 자신을 잡으려고 집으로 처들어오지나 않을까 전전긍긍이다. 사이버 세상에서 가면이라는 닉네임을 썼던 A씨는 이제 진짜 가면을 쓰고 외출을 한다.

어디까지나 상상에 불과하지만 때론 현실을 풍자한 소설이나 시가 그 어떤 것보다 더욱 날카롭게 현실을 파헤치기도 한다. 완벽할 수 없는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방송의 특성상 잘못된 언행과 순간의 실수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 만약 그러한 부족함이 용납되지 못하는 사회라면, 위 상상에서처럼 모든 네티즌들의 실명이 공개됐을 때 가면을 쓰고 ‘악플’이라는 칼을 휘둘렀던 누군가는 현실에서조차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피해다녀야만 할지 모른다.

▲재범 군이 시애틀 영광장로교회 김병규 목사 부부와 함께 사건이 있기 전 찍은 사진 ⓒ크리스천투데이 DB

채찍에 앞서 따뜻한 배려와 사랑을

사건의 주인공인 여대생과 재범 군은 모두 20대 초반의, 아직은 배워야 할 것과 경험해야 할 것들이 더 많은 나이의 청년들이다. 어쩌면 고뇌와 방황 속에서 치열하게 인생의 가치관을 형성해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망아지에게 준마의 스피드를 요구하지 않고, 송아지로부터 황소의 힘을 바라지 않으며, 강아지에게 맹견처럼 집을 지키라 하지 않는다. 성장해가는 과정에서의 부족함과 미숙함은 당연한 것이기에, 우리는 차가운 채찍에 앞서 따뜻한 배려와 사랑으로 그 성장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이번 문제가 일어나기 전 재범 군은 본지 미국지사인 기독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가족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고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팬들이 학교에 있을 시간에 종종 찾아오면 학교 열심히 다니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잔소리를 한다. 우리를 사랑해 주는 팬들이 감사하고 학업도 잘 되길 바란다”며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팬들과 가까운 사람들이 내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다. ‘재범이는 정말 열심히 하는구나, 정말 멋있고 대단하다’란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누군가의 길을 밝혀주고 보여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한 사람의 꿈은 수많은 실수와 사행착오, 혹독한 시련 속에서 점점 그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고 먹음직스럽게 영글어 간다. 여대생과 재범 군에게 있어서도 이번 일이 그들의 꿈과 소망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고, 또한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러나 이들을 코너로 내몬, 실체없는 비난의 ‘악플’들은 반드시 청산돼야 한다.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여대생과 재범 군의 몫이지만, 고난의 원인을 제공한 한국의 인터넷 문화를 바꾸는 과업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마태복음 7장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