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수 교수.
Ⅰ. 문제제기: 종교와 국가권력

Ⅱ. 서구 기독교 사회의 변화와 개신교 복음주의
Ⅲ. 한국의 종교시장과 타종교

2. 일제시대의 종교와 개신교

일제의 통치는 한국의 종교지형을 새롭게 바꿔놨다. 일본은 서양 문명을 받아들였지만, 서양의 정교분리 개념까지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일본은 천황을 국체로 하는 종교 공동체이며, 이런 의미에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세속 국가가 아니었다. 일본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기는 했지만, 국가의 제도적인 틀 안에서 인정했다. 절대적 의미의 종교자유는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 당국은 신도, 불교, 기독교만 공인 종교로 인정했고, 유교는 교육기관으로 분류해 일제 통치를 돕게 했으며, 천도교와 무속 신앙 같은 민족주의적 종교는 탄압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종교는 국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결정적인 요인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종교를 교묘하게 이용해 조선을 통치하려 했다. 우선 불교 보호정책을 시행했다. 조선 왕조에서 박해받던 불교로서는 기쁜 소식이었다. 총독부는 사찰령을 만들어 전국의 불교 조직을 장악했고, 막대한 보조금으로 사찰을 수리했다. 팔만대장경을 국보로 지정, 보호하기도 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를 종교편향으로 이해했고, 기독교를 견제하려 불교를 이용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불교인들은 이것이 불교를 살리는 길로 인식됐지만, 사실은 불교를 일본화하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유교에도 같은 정책을 사용했다. 사실 갑오경장 이후 유교는 매우 침체됐다. 총독부는 이런 유교에 막대한 자금을 뿌려 친일세력으로 만들었다. 한일합방 당시 총독부는 유생들의 행동이 “충량한 신민의 모범으로서 존경할 만 하다”며 유생과 효자 등 전국에서 유교 가치를 지켜온 3209명에게 천황의 선물을 하사했고,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바꿔 책임자를 총독이 직접 임명, 후원했다. 일제시대 유교는 종교기관이 아닌 교육기관으로 분류됐다. 총독부는 아울러 시들어가는 시골 향교와 서당을 후원했다. 이렇게 유교는 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명맥이 유지됐지만, 결국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불교와 유교는 일제의 이런 조치를 환영했다. 박승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런 종교의 국가적 공인화 움직임에 가장 크게 환영한 측은 조선조 아래에서 도성 출입마저 금지당해 온 불교계와, 조선조의 지배이념이면서도 결국 망국의 길을 걸어야 했던 현실에서 민중들로부터 외면당한 유교계였다. 일제는 한말 복잡한 정세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던 두 종교를 먼저 자신들의 정책에 긴요한 국민 교화단체로 만들기 원했다.

물론 불교나 유교에 대한 이런 보호정책이 진정으로 이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통제했고, 일부 지도자들은 여기에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전통종교는 지원·이용, 기독교는 정교분리, 민족종교는 탄압

위에서 보는 대로 총독부는 유·불교에 자유를 줬지만 정교분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총독부는 조선 정부가 하던대로 유·불교를 자신의 통제 아래 뒀다. 그러면 서양 종교는 어떠했나? 여기서 우리는 유·불교는 이 땅에 있던 종교였으며, 따라서 조선 정부가 통제할 수 있었음에 비해 서양 종교는 근본적으로 서양인이 와서 선교했고, 통제권도 서양인에게 있었다. 즉 서양 종교는 근본적으로 조선 정부의 통제권 밖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난 서양 종교에 대해 총독부는 정교분리를 주장, 자신들의 통치에 간섭을 받지 않으려 했다.

먼저 천주교부터 살펴보자. 천주교는 근본적으로 서양 종교였으며, 프랑스 선교회 관할 아래 있었다. 총독부는 천주교에 정교분리를 요구했고, 천주교는 총독부에 선교의 자유 보장을 원했다. 조선 천주교는 총독부가 제시한 정교분리 원칙을 철저히 지켰고, 가능한 일제와의 마찰을 피했다. 그 결과 천주교는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이런 정교분리 입장은 천주교 신자들로 하여금 3·1운동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교분리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천주교는 신사참배 문제를 일찍 용인했고, 아울러 일제 말 조선과 일본의 천주교를 합치는 데도 같은 노력을 기울여 조선 교구에 일본인 주교를 임명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조선 천주교는 가능한 대로 일본의 조선 통치에 협력했다.

같은 서양 종교지만 개신교는 천주교와 약간 다른 길을 걸었다. 일제는 처음부터 개신교에 대해 회유와 경계의 양면 정책을 사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처음 총독이 됐을 때부터 선교사들을 회유했다. 하지만 일제는 개신교가 일본 통치에 위협이 됨을 잘 알고 있었다. 총독부는 처음부터 개신교를 의혹의 눈초리로 보았으며, 개신교가 천주교와 함께 자신들의 직접적 통치 아래 있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개신교 일제 공인 받았지만, 잦은 마찰·항거 나서

그래서 개신교와 총독부는 마찰이 잦았다. 대표적인 것이 소위 105인 사건이다. 한일합방 직후 일본은 105인 사건을 조작해 기독교 지도자를 박멸하려 했다. 이는 유·불교에 취했던 정책과는 많이 다르다. 다시 말하면 유교와 불교는 총독부 보호 아래 있었지만, 개신교는 강한 견제를 당하고 있었다. 개신교는 일제에 의해서 공인된 종교였지만, 그래서 3·1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공인된 종교들 중 일제에 가장 강력히 대항했다. 우리는 여기서 천도교가 일제시대 공인되지 않았음을 인식해야 한다. 천도교는 일제에게 종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일제시대 개신교는 종교의 자유를 위해 총독부와 싸웠다. 첫째, 1915년 제정된 개정 사립학교 규칙이다. 개신교는 처음부터 학교를 세워 종교를 가르쳤다. 역사적으로 학교교육과 종교교육은 하나였다. 그러나 총독부 입장에서 교육은 국가의 영역이었고, 교과과정은 국가가 정해야 했다. 이런 교과과정들에 의하면 성경과 종교 의식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래서 법으로 금했다. 이것이 개정 사립학교 규칙이다.

선교사들은 여기에 사립학교의 설립 이념이 있으므로 이런 법률은 이를 침해하는 것이라 반발했다. 그 결과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통치 기간 각종 학교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타협안이 나왔다. 이것은 지금까지 계속되는 종교교육 논쟁의 시초다. 개신교는 종교의 자유가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는 ‘선교의 자유’를 포함해야 한다고 믿었다. 천주교에도 당시 사립학교가 있었으나, 개신교만큼 이 문제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둘째, 종교법 제정에 대한 반대다. 일본은 근본적으로 종교를 국가 통제 아래 두려 했다. 그래서 종교법 제정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신앙의 자유와 대립돼 실패했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 다시 시도됐다. 종교법의 주요 내용은 종교 교사의 자격을 규정하는 것과 광범위하게 종교를 통제할 제도를 마련하는 것, 이를 어겼을 경우 부과할 벌금에 관한 것 등이었다. 여기에 다른 종교는 이렇다 할 반대가 없었지만, 개신교는 종교의 자유에 심각한 도전으로 여겨 강력 반대해 법안 통과를 저지시켰다. 그러나, 1939년 결국 통과됐다.

셋째, 신사참배 문제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래 신도를 국가 신도로 승격시켜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려 했으며, 이를 조선에 확대시키려 했다. 신사참배는 한국 전통 종교에서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지만, 기독교와는 마찰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 즉 개신교와 천주교는 처음부터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완화됐다. 먼저 천주교는 1936년 신사참배 허용 훈령을 만들어, 신사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므로 괜찮다고 했다. 이어 개신교도 허용했지만, 장로교회에서 이는 큰 문제가 됐다. 1938년 일제의 삼엄한 감시 하에 열린 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장로교회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했지만, 한국교회 곳곳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주기철 목사와 같은 순교자도 나왔다.

우리가 이상에서 살폈듯 일제시대 총독부의 종교 정책은 매우 불공정하게 진행됐다. 일본은 전통종교랄 수 있는 유·불교에 대해서는 보호 정책을 사용했고, 기독교에는 견제정책을 사용했으며, 민족 종교는 탄압했다. 자신들의 통치목적에 따라 종교를 다뤘다. 특히 불교에 많은 혜택을 주면서, 이를 이용했다. 그래서 일부 선교사들은 일본이 불교를 이용해 기독교를 견제한다고 생각했다. 천도교는 불법 집단으로 간주돼 점점 쇠퇴했다. 기독교는 서양 세력 때문에 노골적으로 탄압하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천주교와 개신교는 가능한 일제와의 갈등을 피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개신교는 일본과 심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일제 시대 종교 시장은 공평하지 않았던 것이다<계속>.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