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델(Mr. E. Thomas Bethell. 1872-1909)은 언론인으로서 영국 브리스톤에서 출생하였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영국에서 발행하는 <런던뉴델리> 기자로 활동을 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4년 3월 10일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서 한국에 특파원으로 내한하였다.

러시아가 남진정책으로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기미를 알았던 일제는, 이를 막는다는 구실로 히로시마에 주둔하고 있던 제5사단 병력을 한국에 상륙시키고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일제는 자신들이 승리를 하자 전쟁보상을 요구하면서 러시아 영토인 사하린을 남북으로 똑같이 분할하여 남쪽은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 한국민들은 이용만 당하고 결국은 1905년 을사늑약조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이 일로 외교권과 국군통수권을 일제에 넘겨야 하는 비극을 만나게 됐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베델은 자신이 창간했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에 일제의 침략행위를 맹렬히 비판함과 동시에, 외국에까지 폭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로 인하여 일제는 1907년 7월 24일 소위 “신문지법”을 제정하였다. 1909년에는 일제가 계획했던 일을 하나씩 실천해 가기 위해서 출판법을 제정하면서 언론 탄압을 본격화 하였다.

이처럼 “신문지법”이 개정되면서 신문기사에 대해서 사전 검열이 시작됐다. 이 일로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이 한국에서 발행하는 신문이라는 이유로, 일제는 비난하는 기사를 활자화하게 되면 가차 없이 붉은 글씨로 ‘불가(不可)’라는 도장이 찍혀 세상에 내놓을 수 없게 됐다.

일제는 국내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엄격히 통제하는 한편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한민보], 하와이에 발행하는 [신한국보], 러시아에서 발행하는 [대동공보]도 일제의 침략성에 관한 기사가 계속 발표되자 이 일로 일제가 계획했던 식민지 통치가 어렵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또다시 신문지법을 개정 강화하였다.

이처럼 불의한 악법을 만들었던 일제의 강압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1908년 6월 10일 [신한국보]는 “한국인의 손과 발, 여기에 눈까지 막아버리는 일이 대낮에 대한 천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설을 발표했던 일이 있었다. 이처럼 비슷한 기사로 인하여 1909년 1월부터 1월까지 압수된 총건수는 141건이나 됐으며, 압수된 부수도 무려 2만1천여건이나 됐다. 이중 베델 사장 겸 기자가 발행 했던 [대한매일신보]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일제가 압수해 간 부수만도 16,314부나 됐다.

일영동맹을 맺고 있던 일제는 영국에 압력을 가하여 베델을 체포했다. 베델은 이로 인해 3주간 형을 받아 중국 상해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고 다시 한국에 나왔다. 그는 일제의 오랜 탄압과 경영난으로 인하여 몸이 쇠약해지면서 1909년 5월 1일 37세의 아까운 나이로 서대문 자택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마지막 그의 유언은 “나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였다. 1910년 6월 그가 묻혀 있는 양화진에 묘비를 세웠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