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리 스크렌톤(Mrs. M. F. B. Scranton. 1832-1909) 여선교사는 아들 스크렌톤(Dr. Rev. W. B. Scranton. 시란돈) 부부 선교사와 함께 서울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매리 스크렌톤 선교사는 미국 매사스추세츠에서 출생하였으며, 1872년 불행하게도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 부부와 함께 서울에 오게 됐다. 아들인 스크렌톤은 의사였지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부부가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파송받고 내한했다. 매리 스크렌톤은 53세의 나이로, 이미 선교사로 활동할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지났지만, 조선 여성들에게 할 일이 있다 하면서 함께 일본까지 오게 됐다.

일본에서 얼마 동안 머물면서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터득한 다음 아들인 스크렌톤은 1885년 5월 3일에 서울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의 부인과 딸, 그의 어머니 매리 스크렌톤 여사는 6월 20일 인천에 상륙하였다.

아들 스크렌톤은 광혜원에서 알렌 의사와 협력하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보낸 의료기구와 약품이 도착하자 1885년 9월 10일 정동에 있는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시병원을 개원하였다. 뜻하지 않게 가난한 환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어느 날 매리 스크렌톤은 아들과 함께 서대문을 지나가다가 어느 여인이 아이를 안고 가마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때 매리 스크렌톤은 천사가 보낸 아이라면서 아들에게 연락해서 지나가는 인부를 동원, 시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하고 어린아이는 자신의 집에 데리고 왔었다. 매리 스크렌톤은 이들이 하는 일에 감동이 되어 인부들에게 삯을 주었지만 완강히 거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역시 예의의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86년 5월 31일 이 여자아이로 문을 열었던 학교가 바로 이화학당이 되었으며, 학교 이름은 민비가 친히 이화(梨花)라고 지어주었다.1910년 대학과를 신설하였으며, 매리 스크렌톤은 여성 교육에 헌신하다가 1909년 10월 8일 75세로 삶을 마감하였다. 이화학당 학생들과 동창들의 애도 속에 장례식을 거행하고 그의 시신은 양화진에 안장을 하였다. 이화 100주년을 맞이한 1986년 5월 31일 이화의 식구들이 그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어서 기념비를 양화진에 세웠다.

그의 아들이자 의사이며 목사인 스크렌톤 선교사는 정동을 떠나 상동으로 자리를 옮교 민중 속으로 들어가 선교활동을 하였다. 스크렌톤은 “목회는 가난한 민중을 일깨워 훌륭한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면서 1888년 10월 중국 남창동으로 이동하고 상동병원과 상동교회를 설립하였다. 때마침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하는 전덕기에게 복음을 전하자 감화를 받고 상동교회에 출석하여 목사가 되었으며, 민족운동가 또는 민중운동가로 활동도 하였다.

후에 상동교회는 상동청년학원을 운영하면서 젊은 청년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상동교회에서 목회하는 아들 스크렌톤의 정신에 감동이 된 어머니 스크렌톤 선교사는 자원해서 상동교회 전도사로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스크렌톤 선교사는 미국 감리교를 떠나 잠시 성공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말년에는 일본 고베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의료 사업을 하던 중 1922년 3월 66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지금도 고베에는 그가 살았던 곳이 남아 있으며, 그의 시신은 롯고잔(육갑산)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상동교회에서 그를 민중적인 목회로 남대문 시장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던 인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