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상(Toussaint, 만성절)날 깔뱅(칼빈)의 친구인 니콜라 꼽이 마튀랭(Mathurins)교회에서 파리대학교 총장 취임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 초안을 작성한 깔뱅은 박해를 받고 도망자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분노한 프랑수와 1세는 12월 10일 의회에 루터 이단에 대한 내용의 서한을 보냈고, 파리 소르본 신학부 교수진과 로마 가톨릭 고위 사제들은 그 연설문이 이단자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박해를 가하게 된다.

▲깔뱅(칼빈)의 친구인 니콜라 꼽이 설교했던 마튀랭 교회.
이때 깔뱅도 엉골렘으로 피신하여 친구 루이 듀 띠에(Louis du Tillet) 집에 은신하였다가, 1534년 5월 4일 생가 느와용에 가서 사제직을 반납한다.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에 왕의 침실문에까지 미사를 반대하고 성직자를 비난하는 벽보가 나붙은 사건으로 개신교 핍박은 더 강해진다. 프랑수와 1세는 수백 명의 개신교들은 투옥하고, 이중 35명을 화형에 처하였으며, 깔뱅의 친형제 중 하나를 처형하였다. 그 다음해에 교황 바오로 3세에게 더욱 잘 보이기 위해 자기 영토 내의 모든 이단들을 완전 제거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한다.

▲마튀랭교회는 성 바돌로메 학살 때 완전히 파괴되고 지금은 그 잔해 옆에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깔뱅 역시 망명자가 되어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깔뱅은 26세의 나이로 개신교의 실상을 왕에게 알리는 변증서인 <기독교 강요>(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1535년 8월 23일에 완성하고, 1536년 3월 바젤의 인쇄업자 토마스 플래터는 이를 출판한다.

그 후 1547년에 프랑수와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앙리 2세(Henry 2)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는 더 심해졌다. 앙리는 1551년 샤토 브리앙 칙령을 선포하여 성경과 관련된 책이나 제네바에서 출판된 책들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는 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1550년 경부터 제네바에 망명 중이던 깔뱅이 자신의 제자들을 프랑스로 보내어 부르주아 계층을 중심으로 복음 운동을 시작하면서 개혁 운동은 점차로 확산되게 된다.

이 때 깔뱅의 가르침을 따른 프랑스 개혁자들을 위그노(Huguenots)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세력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간다. 대학 교수, 의사, 변호사와 같은 지식층은 개혁 운동만이 프랑스를 살릴 수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하면서 적극 동참하였다.

▲파리 최초의 개신교회가 세워진 비스꽁티 거리. 과거에는 마레 거리라고 불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위그노 최대 박해자 중 하나인 앙리의 재위 중인 1555년, 파리 최초의 개신교 교회가 비스꽁티(rue Visconti) 거리에 세워진다. 과거 이곳은 많은 야채(maraîchère)를 재배했기에 마레 거리(rue des Marais)라 불렸다. 이 거리는 현 개신교에 있어 아주 중요한 장소요, 개신교 교회의 요람과 같은 곳이기에 ‘작은 제네바’라 불린다.

이 거리가 개신교인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장점 중 하나는 ‘이중 사법권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23미터 길이의 이 거리 동쪽 7개의 집은 성당의 권한에 속하는 곳이었기에 개신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집을 비밀히 개방하여 교제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 지역의 매력은 이중 사법권만이 아니다. 그 당시는 이곳에 많은 건물이 건축되지 않았고, 기존에 있던 집들은 시골집이거나 시골 기와집이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강을 따라 긴 들판과 많은 초목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파리 시내에 있는 이 좁은 길에 많은 사람들이 모임을 가졌으나 소리는 좀체 나지 않았다.

▲비스꽁티 거리의 현재 모습.
교회의 설립은 라 페리에(La Ferriere)라는 가정에 아이가 출생하는 일로 시작된다. 당시 개신교도들은 교황청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야간에 모이고 헛간이나, 동굴 인적없는 장소에서 은밀히 예배를 드렸다. 목사가 없는 가운데서 성경공부와 예배를 위한 모임으로 가정 중심의 모임으로 신앙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라 페리에는 자신의 아이가 신부가 아닌 개신교 목사에게 세례받게 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에는 목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목사에게 세례를 요청하기 위해서 파리에서 540km나 떨어진 제네바까지 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성례를 위해 개혁교회의 설립은 긴급한 요청이었고, 23세의 쟝 르 마송(Jean le Maçon)이 라 페리에의 집에서 파리 최초의 개신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교인들은 쟝 르 마송을 목사로 선출하고 장로와 집사를 선출하여 교회를 조직한 후, 라페리에의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다. 이로써 파리 최초의 교회에서, 개신교 최초의 세례가 베풀어졌으며, 최초의 총회가 열린다. 이들은 극한 위험 가운데서도 사제들에 의한 미사를 거부하고 목사에 의한 말씀과 세례와 성찬을 시행하였다.

▲프랑스 첫 목사가 배출된 곳이며, 첫 세례식과 첫 교회 회의가 열린 장소.
그리고 같은 해에 모(meaux), 엉제(Angers), 루동(Loudon), 쁘와띠에(Poitiers), 그리고 아베르(Arvert) 지역 등 4개 처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 후에는 디에프(Dieppe), 뚜르(Tours) 등에도 교회가 설립되어 1559년경까지 개혁교회 수는 72개 처에 이르렀다. 또 1561년 말에는 프랑스 전역에 670 여개의 개혁교회가 설립되었다.

깔뱅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가 프랑스 내에서 속속히 세워지자, 제네바에 더 많은 목회자를 파송하여 줄 것을 요청한다. 제네바에서 훈련받은 사역자들이 교회를 맡게되자 사회 지도적 인사들도 많이 출석하게 된다.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바로 옆 비스꽁티 거리에서 열매를 맺어 개신교 교회의 요람이 된다. 이 거리의 지하실은 다른 곳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경찰의 습격에도 도주하기에 용이했다. 1685년 예배의 자유를 허락한 낭트 칙령이 취소된 후 위그노를 박해할 때에도 이곳 거리에 비밀리 총회를 갖는다.

▲비스꽁티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이 거리에서 바돌로메 학살 때 작은 제네바의 많은 교인들이 순교한다.
1572년 바돌로매 대학살 때 비스꽁티 거리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필립 아구스트(Philippe Auguste) 시대의 성벽이 있는 곳에서 대부분 순교한다. 작은 제네바에 거주하던 위그노들은 세느강 쪽으로 도주하지만 이곳 문을 닫는 바람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곳은 프랑스 개신교의 요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거리에도 이곳의 개신교 역사를 알리는 표지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