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달리 해외 여행이 자유로워진 관계로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파리를 방문한다. 하지만 대부분 많이 알려진 곳에 와서 겨우 사진 찍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에 바쁜 일정이라 그곳의 역사의 정취를 맛보고 가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파리는 개신교 교회의 순교 현장이기도 하다. 강이 아름답다고 여기며 강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 없지만 그곳 세느강이 바로 순교의 현장이며, 다리 아프게 다니며 여기 저기 기웃기웃하는 루브르 박물관 주변이 또한 그러하며, 빅토 위고의 집 근처 보쥬 광장이 그러하다.

이제 기자는 관광 중심의 프랑스 안내가 아니라 개신교 순교 역사 위주로 파리와 프랑스를 기자가 직접 발로 뛰어 다니며 확인하고 취재한 곳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 처음 장소가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이다.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
메로빙거 왕조 시대였던 서기 542년, 클로비스 왕의 아들인 쉴드베르 왕이 예수님이 못 박혔던 십자가의 일부를 포함한 성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수도원을 지으면서 이 성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생 제르망이라는 이름은 당시 파리의 주교였던 생 제르마누스(Saint Germanus)의 이름을 딴 것이며, 프레(Près)는 풀밭이라는 뜻으로 ‘풀밭의 성 제르마누스 성당’이라는 의미다.

이 성당은 메로빙거 왕조가 끝날 때까지 건립자인 쉴드베르 왕을 비롯한 메로빙거 왕가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8세기 들어 가톨릭 수도회 중의 하나인 베네딕트파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프랑스에서 가장 강력한 수도회가 되어 후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가톨릭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노르망디인들의 약탈로 인하여 파괴된 성당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건한 것은 11세기를 전후해서였다. 중세의 건축 양식이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손꼽히는 이 성당은 12세기에 건축을 시작한 노트르담 대성당과 함께 파리에서 가장 유명하고 세력이 강한 성당으로, 한때 교황과 파리 주교의 세력이 대립하던 현장이었다. 고딕식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비교되는 11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인 이 성당의 겉모습은 화려하거나 웅장하다는 느낌 대신 강건한 요새와 같은 느낌을 준다. 현재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종탑도 이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 주교관.
이런 오래된 성당이 프랑스 개신교의 종교 개혁의 발생지가 되었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프랑스의 초기 종교개혁운동이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혁자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로마 교황이 주교와 수도원장의 임명권을 프랑스 왕에게 양보하기로 조약을 맺은 1516년부터이다.

그 대표적인 개혁 운동을 이끈 인물이 르페브르(Jacque LeFevre d''Etaples, 1450-1537)이다. 그러나 르페브르가 이런 개혁 운동을 할 수 있게 도와준 인물이 브리소네(Guillaume Briconnet, 1472경~1534. 1. 24)이다. 르페브르는 브리소네의 친구이자 제자로서 개혁주의 노선을 걸었으며 자신의 주교구에서 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자기 주위에 젊은 인재를 불러 모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알려진 인물이 기욤 파렐(Guillaume Farel)로서, 나중에 칼빈에게 아주 강력한 영향을 주게 된다.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 주변에는 사르트르와 보바르 등 유명인들이 자주 들렀던 마고 카페가 있다. 때문에 이 주변을 ‘사르트르 보바르 광장’이라고도 한다.
그는 1507년에 생 제르맹 데 프레 성당의 수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교회 내의 종교 개혁을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신학자이며 인문주의자인 르페브르에게 개혁의 일을 맡겼다. 르페브르는 고대와 성인들의 글을 근거로 하여 교회의 공식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제도적인 로마 교회에 도전하였다. 1508년에 시편 주석을 시작으로,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이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된다고 보았고, 이러한 사상을 1512년 출판한 ‘바울 서신 주석’에 진술하였다.

1518년 브리소네는 Meaux 지방 주교로 발령나게 되는데, 그는 르페브르를 자신의 보좌 신부로 임명하게 된다. 르페브르는 1522년에는 ‘복음서 주석’을 출판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 복음, 자유, 희락,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삶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찬양하였고,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극찬하였다. 성경에 대한 무지가 미신을 초래한다고 확신한 그는 1523년 프랑스어로 신약 성경을 번역하였고, 백성들 가운데 널리 보급하여 프랑스인의 가슴 속에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심었다.

르페브르의 영향으로, 성경에 근거하여 믿고 생활하자는 운동이 지성인들 사이에 번져갔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수도원장 기욤 브리소네(Guillaume Briconnet), 프랑스 콜레쥬 창립자 기욤 뷰데(Guillaume Bude), 피에르 카롤리(Pierre Caroli), 훗날 칼빈이 도피 중 브리소네를 만나러 네락(Nérac)으로 갔을 때 만나게 되는 궁중 설교가 루셀(Gerard Roussel),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훗날 파리 주교가 되는 Jean du bellay 등이 있다.

그들은 르페브르의 성경 중심적 사상에 감화를 받은 후, 설교와 강의를 통하여 로마 천주교회의 고질적인 악습, 분별없는 성인 숭배와 성물 숭배를 비판하였고, 성부와 성령 하나님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을 정죄하였다.

▲르페브르가 사람들을 가르쳤던 가르쳤던 동정녀 성당의 터. 지금은 아파트가 세워져 있다.
생 제르망 데 프레 왼쪽 작은 길, 주교관 앞 8번지는 르페브르가 개혁의 필요성을 가르쳤던 동정녀 성당이 있었던 자리이다. 그 주소를 찾아 다섯 번 방문했다. 분명 기록에 나오는 주소이지만 성당의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 주소 뒤쪽으로 성당이 있을지 몰라 건물 주변을 다 돌아보았으나 성당의 건물을 찾을 수 없었다. 뒤쪽으로 2층 집으로 된 들라크루아 박물관이 있어 그곳을 방문하여 찾아보았으나 성당은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역시 대부분 관광객이기에 알 리가 없다.

이걸 어쩌나……. 그래서 다시 기록들을 찾아보았는데 “그 자리에 성당이 있었던”이라는 과거형의 문장이었다. 그러면 지금은 없다는 이야기다. 왜 없어졌는지는 다시 찾아봐야 할 숙제다. 기록에 의하면 르페브르가 가르쳤던 작은 성당은 파리의 고딕 건물 중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런데 왜 그런 중요한 건물이 지금은 없는지, 혹시 이곳이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던 곳이기에 고의적인 파괴는 아닌지……. 아쉬운 마음으로 성당이 있었던 곳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의 건물만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개혁에 대하여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는 위그노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그의 누이 마흐규리트로 인해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는 환영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마흐규리트의 딸 쟌느 달베르는 개혁운동을 지지하였고, 그녀의 아들인 나바르의 앙리는 개혁운동의 후원자가 되었다.

칼빈 역시 수도원장 Guillaume Briconnet의 부름을 받아 파리로 오게 되며, 이름도 Jean Cauvin에서 Jean Calvin(라틴어로는 Ioannis Calvinus)로 바꾸게 된다. 칼빈은 1521년 브리소네의 도움으로 설교를 시작하게 된다.

인문주의적인 개혁운동은 급진적인 개혁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개혁 사상의 보급과 함께 많은 무리가 로마 천주교회의 미신적인 예배와 폭정을 급진적으로 개혁할 것을 촉구하였다. 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일어나자, 프랑스 왕실은 1525년부터 개혁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최초 루터주의자 쟝 발리에르(Jean Vallière)가 산 채로 화형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브레소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며, 개혁주의적 친구들에게 더 이상 자신의 교구에서 설교하지 말도록 금지하였다. 그러나 파렐은 그런 금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주의 설교를 계속하였다. 그 후에 브리소네는 지역 공의회(synod)를 소집하여 루터의 저작들을 정죄하였고, 연옥과 성인 숭배, 마리아 숭배 등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는 사제들을 책망하였다.

하지만 브리소네는 소르본느에서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프랑수와 1세는 그를 투옥시킨다. 그러자 르페브르와 그의 제자들은 스트라스부르그로 도주하게 된다. 그리고 남이 있는 사람들은 1546년에 비밀리에 모(Meaux) 지역에 최초로 개혁교회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얼마 후 박해로 인하여 폐쇄되었다.

기자는 곧 가까운 시일 내에 파리에서 60킬로 정도 떨어진 모 지방을 방문하고 그 역사의 흔적을 취재할 것이다. 불행한 것은 개신교의 자유를 일부 허락한 낭트 칙령이 취소되면서 프랑스 내 모든 개신교회들은 다 파괴되었기에 건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있었던 그 터의 흔적이라도 사진에 담아 독자들에게 전하려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총신대학교와 총신대학교 대학원 목회학 석사(M.Div)
평택 한광여고에서 교사와 목사로서 4년간 재직
프랑스 선교사로서 파리 안디옥 교회와 쁘아띠에 한인교회에서 목회
G.M.S 소속 선교사[파송교회: 엘림교회(박종인 목사)]
현재는 프랑스 현지 교회와 공동 사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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