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미학자 쥐요(M. J. Guyau, 1854-1888)는 그의 <사회적으로 본 예술>이란 책에서 “예술적 감정은 원래 그 본질에 있어 사회적인 것이다. 결과로서 나타나는 개인의 생명은 좀 더 큰 보편적인 생명과 결합시킴으로서 이것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문학은 한 작가의 개성이 보편성을 지니면서 문학적 생명이 길어진다고 했다.

개인의 정서는 순간적이고 개성적인 것이지만, 인류 보편적 정서와 감정은 시대를 초월하며 또 변하지 않는다. 감정과 정서의 보편성을 노래한 것이 문학이다. 천부의 문학적 재능이 없더라도 문학을 통해 향수할 수 있는 이 미(美)로 인해 인간의 삶은 행복한 광휘를 맛볼 수 있다. 진(眞)이 존재의 의미라면 선(善)은 존재의 기능이다. 그리고 미는 존재의 축복이다.

감정이나 정서는 미의 요소인 동시에 문학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다. 그들은 순간적·개성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사랑이나 희열 뿐만 아니라 심각한 행위의 재현에서 느끼는 성찰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

(욥기 1:21)

위 시는 욥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옮겨지고 사탄이 그를 쳐서 모든 재산과 자식을 빼앗았을 때 부른 노래다.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사막의 행복한 귀족인 욥이 하루 아침에 삶의 모든 평화와 행복을 잃게 되었을 때, 그 참담한 불행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에서 느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생과 사의 문제에 대해 철학적 성찰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죽음을 하나님의 섭리로 인정하는 생에 대한 철저한 긍정적 관점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감정과 사상의 상호작용이라는 극적인 이 드라마에서 인간이 느끼는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 관점이다. 우리가 욥의 시대가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욥기>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문학정신을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불멸하는 정서에 호소한 서사시로서 그 보편성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러시아 정신의 표현자인 톨스토이도 정화된 미를 사랑과 동일한 차원으로 보면서 사랑을 행동, 곧 삶 자체와 일치시키는 보편성을 보여준다. 이성에 의한 이러한 인식적 삶은 미적 과정을 거친 쾌감인 동시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환원된다. 그 속죄의 희열로 러시아의 정신을 정립하려한 것이다.

우리는 러시아 문학의 2대 지주로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든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지식 계급의 대표작가로서 러시아의 부조리와 죄악에 대해 많은 사랑으로 속죄하려고 했다면, 톨스토이는 행동으로 러시아의 정신을 정립하고 속죄하려고 했다. 그의 ‘행동’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송영옥 박사는

<한국수필>에서 수필로, <문단>에서 단편소설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국제 PEN클럽 정회원이다. 창작집으로는 <미운 남자>, <하늘 숲>, <해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지구를 떠돌고 싶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와 영한시집 , 그리고 문학이론서 <기독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세종대, 미국 텍사스 주립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경북대 대학원에서 헨리 제임스 전공으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75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는 Y's Man International에서 국제여성부장(International Director for Y'Menettes)을 두 차례 역임했고, 신문·잡지의 연재계약으로 전 세계 60여 나라를 여행, 문화 예술 기행을 했다. 현재 영남신학대학교 외래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