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박사.
아직 바람에는 눈발이 섞여있고 언덕 밑으로 흐르는 작은 시내에도 얼음이 그대로 남아있다. 어느날 한 줌 햇살이 그리워 창문을 열었는데 양지바른 곳 창 앞의 작은 정원에는 목련나무 한 그루가 움을 틔우고 있었다. 딱딱한 나무껍질을 깨고 뾰족하고 작은 손가락 하나를 하늘을 향해 내어밀고 있는 여린 싹. 연두색인지 연노랑색인지 명명할 수 없는 신비한 색깔이다. 나무 밑에서도 마른 풀 속에서도 무거운 흙덩이를 밀치고 있는 수줍은 저들의 신음 소리. 어서 마당으로 나가자. 성급한 걸음이어야 한다.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연하고 부드러운 숨소리, 이는 흙의 소리이며 새의 울음이며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노래며 바람의 언어이다. 보았지 않았는가. 그 순간 한 뼘밖에 되지 않는 작은 뜰은 당신의 상상력이 뛰어다니는 드넓은 초원이 되는 것을. 주위의 소음과 번잡한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듯 자연의 소리만이 들려오는 곳, 즐거움이 넘치는 희귀한 어느 별자리 하나, 그래서 당신과 나는 천체의 어느 멀고도 외진 곳에 와있는 듯 하다.

나무는 살갗을 터쳐 싹을 낸다. 흙은 몸으로 울며 움을 틔운다. 자신을 깨뜨려 아름다운 삶의 향연을 베푸는 자 그들은 누구인가.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오래 전 한일 간의 와이즈멘 지도자 협의회가 요코하마에서 열렸을 때였다. 회의 전날 투게더 나잇에서 나는 일본 측 준비위원장인 고채치흥 씨로부터 정중한 사과를 받았다. 과거 36년간 일본 정부가 한국 국민에게 저질렀던 비인간적인 만행에 대하여 일본 국민과 일본의 전 와이즈멘 지도자를 대신해서 사과하니 받아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는 자신의 이 말을 의식을 갖추고 공식화했는데 나 역시 숙연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무슨 대표자라도 되는 듯이 수락(?)하게 되었다. 협의회가 열릴 그 즈음 정신대 문제로 우리 국민들은 너무나 감정이 격앙되어 있었다. 분노한 어느 시인은 ‘왜놈의 밑쑤시개 군수품으로 능멸된 박꽃 같은 그대/ 뉘라서 그 원혼을 달랠 수 있으랴’ 하고 피를 쏟아 글을 썼다. 불편한 우리도 협의회 개최여부를 망설이던 때였으니 와이즈멘의 오랜 우정을 생각해서 일본 측으로는 당연한 사과였으리라. 그러해도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났다. 목구멍까지 무엇인가 차올라 고채치흥씨보다 더 허리를 굽혔다. 자신을 깨고 살갗을 터치며 향연을 베풀던 자여, 이월이 생일인 자 그대에게 축복 있으라. 이제 고통에 입 맞추자. 고통은 심연으로부터 흘러나온 생명의 멜로디이다.

마른 바람이 겨울 끝자락을 붙잡고 심술을 부린다. 번개였지. 지난밤 쉼 없이 어두운 밤 하늘에 불꽃의 줄을 그어대던 것이. 그는 달빛을 삼키고 달의 꿈처럼 아름다운 곡선을 그은 후 이제 마른 바람이 되어 돌아왔다. 타다 남은 번개의 흔적 그래서 주문처럼 바람이 분다. 안타깝게 삼월을 기다리면서도 겨울이 얼마 남았는지 알 수 없는 때에, 대지가 언제 다시 눈을 뜰 것인지, 일어서는 그 계절이 문턱에 왔음을 바람은 알려준다. 지붕 꼭대기 눈을 마주 쓸어내리고. 이어 어둠 속에서 뚝… 뚝… 낙수물 소리, 한 줌 남은 바람의 열정이다. 그래서 지붕 위의 눈은 흘러내리면서 눈사태의 우람한 소리를 낸다.

봄의 전야제인 2월의 마지막 밤은 신화를 낳는다. 다른 달보다 하루 이틀이 적어 더 아쉽다. 봄과 가장 가까운 때이고 인고의 시간이 묻히는 공간이다. 땅은 녹지 않았고 숲은 정적에 싸여있고 두더지는 아직 땅 속에 들어가 있을지라도 이 밤이 지나면 어김없이 삼월이 온다. 우주의 시간 속에는 생명이 자라고 있다. 무대를 만들자. 그 율동이 시작될 터이다. 희망의 채비는 끝났는가. 학년이 바뀌고 학교도 바뀐다. 변화의 우렁찬 소리. 희망은 얼마나 깊고 탐욕스럽게 정신을 자극하는가. 이월의 마지막 밤은 영원히 어린 시절이다. 머리 속은 항상 벌이 사는 듯이 윙윙거린다. 정신이 크고 몸이 자라고 욕망이 팽창한다. 그러하니 2월은 희망을 꿈꾸기에 좋은 시간이다. 비록 금년 2월 우리 모두가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지라도 작은 희망의 불씨를 다시 살려내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 내가 2월에 사랑하는 것은 이 작은 것들이다. 연한 새싹들이 눈을 뜨는 내 작은 뜰과 자신을 깨뜨리는 용기 있는 친구들과 겨울 끝자락을 놓지 못해 발버둥치는 마른 바람과 짧고 아쉬운 2월의 마지막 날이다. 그리고 남아시아로 직접 달려가지 못할지라도 그들의 희망을 위해서 눈물 흘리고 있는 당신들이다. 이 작은 것들과 함께 따라오는 삼월에의 숱한 설레임은 위대한 야성의 화신이다. 초원 사이로 나 있는 오솔길로 달려나가 함께 즐기자. 그 충만함을, 그 풍요함을. 한껏 부풀어 격동하는 심장을 가진 행복한 이들이여 함께 가자.

-송영옥 박사는

<한국수필>에서 수필로, <문단>에서 단편소설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국제 PEN클럽 정회원이다. 창작집으로는 <미운 남자>, <하늘 숲>, <해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지구를 떠돌고 싶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와 영한시집 , 그리고 문학이론서 <기독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세종대, 미국 텍사스 주립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경북대 대학원에서 헨리 제임스 전공으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75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는 Y's Man International에서 국제여성부장(International Director for Y'Menettes)을 두 차례 역임했고, 신문·잡지의 연재계약으로 전 세계 60여 나라를 여행, 문화 예술 기행을 했다. 현재 대신대에서 기독문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