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술적 사명


1988년 소설가 이청준씨가 5·18 광주항쟁을 상징적 주제로 썼던 작품 ‘벌레 이야기’가 20년이 지난 오늘날 이창동 감독에 의해 으로 영화화됐다. 이라는 영어표현은 표기상으로도, 그리고 작품의 주제상으로도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은 지난해 칸 영화제 초청작이었고, 여주인공 전도연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소설이 영화화된 것이나 칸 영화제 수상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은 충분히 대중의 관심 속으로 들어올 만했다.

후기산업사회 패러다임이 우리 의식을 지배하는 가운데 예술은 개인의 발견과 감각, 관능을 중시하면서 대중화·세속화의 길로 치닫고 있다. 이 때문에 고전 시대의 가치였던 질서 내지 총체성이 붕괴되는 현실에 서게 됐다. 그래서 문학을 비롯한 현대 예술은 질서와 총체성이 존재했던 고전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갖고 예술적 탐색을 통해 그러한 가치의 궁극적 회복을 믿고 싶어한다.

이런 시점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용서할 수조차 없도록 억압당하는 현실을 고발했던 문학작품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인간을 억압하는 조건들에서 죄와 용서와 구원의 문제로 끌어와 오늘의 문제로 재구성한 이창동 감독에게 격려와 찬사를 보낸다. 그동안 한국 영화도 감각과 가벼움을 추구하는 시대의 기호와 맞물리면서 대부분 인터넷 소설이나 일본 소설 등을 원작으로 하고 있었다. 때문에 은 고전 시대의 가치에 대한 애정으로 보이며 감독의 예술관과 시대적 사명감을 짐작케 한다.

억압당하는 것에 대한 고발은 문학에서 뿐 아니라 모든 예술에서 인간의 영원한 주제다. 인간을 억압하는 이 부정적인 힘에 대한 인식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해서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한다. 이 열망은 인간의 잠재된 욕망이다. 이 감독은 인간 열망의 실현 가능성을 원작 소설에서보다는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원작에서는 엄마가 유괴범을 용서하러가다 같은 상황에서 자살하지만, 밀양에서는 죽지 않고 미친다. 자살은 세계와 신에 대한 부정이다. 어떤 상태로든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2) 한 작품의 기독성이라는 것

그런데 에서 신앙과 고통, 구원의 문제를 기독교적 소재로 다뤘다는 점은 많은 기독교인들의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 됐다. 이런 관심은 기독교적 소재의 작품에 대한 당연한 결과이며, 논란의 원인은 기독교적 소재로 다룬 작품에서 구원과 용서의 문제를 비성서적으로 만들어 기독교를 모욕했다는 분노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에 대해 영화평론가들은 이창동 감독이 기독교를 모욕할 의사가 없었다고 해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감독 스스로도 단지 이 영화는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는 하늘이 아니라 두 발을 딛고 서있는 땅에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며, 영화의 초점은 인간”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을 주제로 포럼을 열고 온라인에서도 뜨거운 논의가 진행됐다. 논의의 결과로 기독교인들은 을 기독교 영화로 볼 것이냐, 안티 기독교 영화로 규정할 것인가를 결정하려 했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런 논란이 예술에 대한 편견과 편협함에 기인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기독 문학이나 기독교 예술이라는 개념은 작품 소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다. 단지 작가나 예술 창작자의 세계관과 인간관, 역사관이 성서적일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작품에 기독성을 부여할 수 있다.

3) 밀양에 기독성을 부여할 수 있는 근거

의 초점은 감독이 스스로 밝혔듯 ‘인간’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 ‘구원’의 문제를 심도깊게 다루기 위해 기독교를 소재로 차용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결말을 성서적으로 맺지 않았다. 그 한 예로 신애가 사형수의 평화를 문제삼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은총으로, 단 한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 관계를 무시하고 진정한 참회를 모르는 유괴범의 태도가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 그 어떤 기독교 영화보다 더 기독교적인 감동을 끼치고 있다.

여기서 기독교적인 감동이란 기독교의 연약함과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빗나간 부흥회나 특별집회, 전도 방법들이 공개돼 기독교인들만의 성역으로 여겼던 이러한 것들이 세상에 어떻게 비춰질까하는 우려와 함께, 그러한 것들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의 기독성은 논의 대상이 아니라 관객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고 본다. 조금만 더 이 영화를 개인적이고 철학적인 시각으로 접근해 본다면 영화가 부정하고 거부한 것은 교회와 교인들의 신앙 방법이지 성경과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문화적 존재다. 문학이나 예술을 통해 길을 찾고 진리를 모색하며 생명을 꿈꾸는 것이 인간이다. 예술을 통해 찾아가는 길은 감동이라고 하는 심리적 반응을 통해서인데, 이 울림은 한 인간이 대상을 자기의 온몸과 직관으로 파악하는 행위를 말한다. 문화에 대한 열린 시각만이 예술적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사람의 삶의 기쁨과 고통에 동참할 수 있다. 그 확인을 통해 고통과 기쁨을 자기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을 억압하는 세상의 모든 것은 유용하고, 그 유용성 때문에 권력을 지니게 되지만 예술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기 때문에 그 감동의 원초적 느낌의 단계는 힘이 아니고 감각적 쾌락이다. 쾌락은 고통을 동반하고, 고통은 반성과 각오를 통해 대상의 총체적 파악에 이르게 된다. 영화 에 우리 스스로가 기독성을 부여할 수 있는 근거는 이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이 영화가 한국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만이 아닌 종교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타 종교가 소재로 됐어도 똑같은 치부가 드러났을 것이다.

때문에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영화의 기독성을 규명하기 위해 힘을 소진할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와 기독 예술에 대한 새로운 비전 확립을 진지하게 논의해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용서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피조물의 무력감 앞에서, 그리고 신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우리 앞에 놓일 때 그 절망을 딛고 살아날 수 있는 은총, 뭐랄까 성령의 역사 같은 것을 예술 속에 담는 작가를 꿈꿔보는 것은 어떨까. 그런 사람을 발견하고 후원할 수 있는 총체적 시스템 구축에 힘을 모을 비전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한다. 에서 우리가 느끼는 실망과 모욕감은 교회와 우리의 신앙방법에 대한 것이다.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긍지, 그리고 신뢰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닌가.

-송영옥 박사는

<한국수필>에서 수필로, <문단>에서 단편소설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국제 PEN클럽 정회원이다. 창작집으로는 <미운 남자>, <하늘 숲>, <해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閃 囚구를 떠돌고 쏀덛>,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와 영한시집 , 그리고 문학이론서 <기독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세종대, 미국 텍사스 주립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경북대 대학원에서 헨리 제임스 전공으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75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는 Y's Man International에서 국제여성부장(International Director for Y'Menettes)을 두 차례 역임했고, 신문·잡지의 연재계약으로 전 세계 60여 나라를 여행, 문화 예술 기행을 했다. 현재 대신대에서 기독문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