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한 여름날 나는 경쾌한 추억 하나로 처진 마음을 일으킨다. 노르웨이 여행길에서 입센(Henrik Ibsen, 1826-1906)의 오막극 <페르퀸트>의 고향 마을을 찾아갔던 일이다. 어느 계절에 찾아가도 노르웨이의 자연은 싱싱하고 새롭고 아름답다. 눈이 녹으며 찾아오는 봄, 꽃은 저마다 향기를 뿜으며 다투어 피어나고 태양이 지지 않는 긴긴 여름의 백야는 신비롭다. 가을은 짧고 아쉽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뭇잎들이 떨어지고 우수어린 북극의 긴긴 겨울이 시작된다.


남북의 직선거리가 겨울만큼 긴 노르웨이는 국토의 삼분의 일이 북극권에 들어있어 알라스카와 같은 위도의 북쪽 끝에 있지만 멕시코 만류의 덕택으로 위도에 비해 연중 따뜻하다. 때문에 어느 계절에 여행을 하든 불편함이 없다. 그러나 입센의 축제가 열리는 여름철 여행은 노르웨이를 가장 예술적으로 느끼게 한다. 오슬로의 여름 축제는 입센의 극으로 막이 오른다.

사람들은 입센이 누구인지는 잘 몰라도 <攝梧暹 帥>이나 노라는 기억한다. 아내이며 어머니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 살겠다며 남편 헤르마 변호사와 결별을 선언하고 용감하게 가출한 노라는 여성 해방의 선구자로 박수를 받았다. 한편으로는 결혼생활과 가정을 파괴하는 부도덕한 여성이라 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어찌되었거나 노라는 신여성의 대명사가 되고 <攝梧暹 帥>은 여성 해방의 서로 인정받게 되었다.

입센이 한국에 알려진 것도 그의 3막 극 <攝梧暹 帥> 때문이다. 1878년경이었으니 그 당시 한국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대단히 보수적인 때였으며 노라는 여성 해방운동의 선구자적 이미지로 대두됐다. 그러나 사실은 입센이 말하고자 했던 일관된 주제는 인간을 얽어매고 있는 한쪽으로 치우친 모럴에서의 해방이었다.

중앙역 앞 카롤 요한 거리의 야외무대에서도 아마추어 연극인들이 <攝梧暹 帥>을 열연하고 있다. 곳곳에서 몰려든 거리의 악사들이 키타와 만도린을 연주하는데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발을 멈추고 연주가 끝날 때 까지 기다려준다. 관람객 대부분이 이 도시의 여행자인 때문이다. 언어와 풍습이 달라도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무명의 화가 앞에도 모델들이 줄을 잇는다.

이 거리는 그 옛날 입센이 즐겨 거닐었던 산책로다. 지금은 자신의 극이 초연됐던 국립극장 앞에 또 한 사람 보른숀 작가와 나란히 서서 방문객을 맞고 있다. 그의 산책로인 카롤 요한 거리는 여름이 되면 세계의 사람들로 만원이다. 유럽 여러 나라들이 그러하듯 노르웨이 사람들도 6-8월사이엔 여름 휴가로 대부분 도시를 떠난다. 그리고 관광객들이 자리를 잡는다.

내가 알고 있는 노르웨이 작가들은 대부분 사람과 소음을 피해 한적한 곳에서 산책을 즐긴 것으로 기록돼 있다. 입센은 자신의 생각과 상상에 방해를 받지 않으려고 자주 도심을 빠져 나갔던 이들 작가와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언제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드는 카롤 요한 거리를 자신의 산책로로 선택하여 항상 프록코트에 실크 모자를 쓰고 장갑을 낀 손에 우산을 들고 매우 천천한 걸음으로 지나갔다. 걸어가면서 자신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것을 즐겼다. 까페에 앉아서는 손거울을 꺼내어 수염을 다듬으면서 몸치장을 하였다. 바로 이러한 입센의 모습이 페르퀸트의 성격을 결정한다.

입센의 대표작은 <攝梧暹 帥>이지만 작가의 고향에 가 보면 <페르퀸트>가 더 사랑받고 있음을 본다. 주인공 페르퀸트는 수다스럽고 거짓말장이에다 바람기 많은 위험한 매력의 사나이다. 남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이 경험한 것인양 꾸며대고 인생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는 교묘하게 피하는 도피주의자-그는 어디를 보아도 도덕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는 페르퀸트 기념상을 곳곳에 세우고 작가의 생가를 보존하듯 그의 생가를 보존하고 무덤을 만들어 입센 애호가들을 맞이하고 있다.

나는 페르퀸트를 만나기 위해 오슬로 중앙역에서 릴하메르행 열차를 탔다. 열차는 동쪽의 논단 산맥과 서쪽의 유톤하이멘산 사이를 북상하고 있다. 연봉들이 아름다운 깊은 계곡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이 일대를 계곡의 여왕이라 부른다. 농장과 산장들이 산과 호수와 어울려 눈부시게 아름답다. 이 웅장하고 수려한 자연이 페르퀸트의 모험의 무대이며 그가 반한 자연이다.

그 하루를 나는 릴하메르에서 샤이를 지나 빈스타르에 이르는 100킬로미터의 길을 천천히 달려 두 번이나 오고 또 갔다. ‘페르퀸트의 도로’ 라 이름하는 길이다. 그런 후 야트마한 언덕들이 보이는 산간마을 페르퀸트 호텔에서 밤을 보냈다.

-송영옥 박사는

<한국수필>에서 수필로, <문단>에서 단편소설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국제 PEN클럽 정회원이다. 창작집으로는 <미운 남자>, <하늘 숲>, <해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閃 囚구를 떠돌고 쏀덛>,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와 영한시집 , 그리고 문학이론서 <기독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세종대, 미국 텍사스 주립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경북대 대학원에서 헨리 제임스 전공으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75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는 Y's Man International에서 국제여성부장(International Director for Y'Menettes)을 두 차례 역임했고, 신문·잡지의 연재계약으로 전 세계 60여 나라를 여행, 문화 예술 기행을 했다. 현재 대신대에서 기독문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