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핵심교리의 영역까지 침범한 이번 SBS 방송 ‘신의 길 인간의 길’은 티모시 프리크(Timothy Freke)와 피터 갠디(Peter Gandy) 공동 저서인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미 방영된 첫회는 상당부분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됐으며, 담당PD 역시 제작 동기를 밝히는 자리에서 “성경에는 무수한 모순들이 존재하지만 그런 것들이 교리에서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책 ‘예수는 신화다’에서는 상당부분이 파격적인 내용들로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예수는 신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뿐 아니라 기독교 핵심교리들을 전면 부정하는 내용으로, 2002년 한국에서 동아일보사가 출판됐을 당시에도 큰 물의를 일으켜 절판된 바 있다.

이번 ‘신의 길 인간의 길’에 방송된 내용들에 대한 신학적 반박도 이미 2002년 당시 활발하게 이뤄진 바 있다. 이에 본지는 <예수는 신화다>가 처음 논란을 일으키던 당시 대전신대 허호익 박사가 쓴 글을 다시 게재한다. (편집자 주)

「예수는 신화다」를 반박함

허호익 박사(한국교회언론위원회 학술위원, 대전신대 교수, 한국기독교학회 총무)

티모시 프리크(Timothy Freke)와 피터 갠디(Peter Gandy)의 공저이며 1999년 영국에서 출판된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라는 논적인 책을 공신력이 있는 동아일보사가 번역하여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판매에 열을 올리는 것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내용은 역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검증된 내용이 아니라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3세기의 영지주의자들의 저작들을 일방적으로 해석하여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기독교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현저하게 왜곡하여 기독교 신앙을 호도하는 것으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 예수의 역사적 생애는 오시리스 신화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예수의 생애와 고대 이집트의 신화적인 인물 오시리스(Osiris)의 생애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는 이유(26, 115-118 쪽)로 예수를 오시리스와 같은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형태적 유사성만 부각하여 본질적인 상이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궤변이다. 물과 기름이 액체로서 유사하다 하여 같은 종류라고 하는 논리를 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의 극치는 예수의 역사적 생애를 왜곡하려는 의도와 오시리스 신화의 본질에 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풀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의하면 오시리스는 땅의 신 게브(Geb)와 하늘의 신 누트(Nut)의 아들로 누이동생 이시스와 결혼하였는데, 후에 형의 지위를 노린 아우 세트(Seth)에게 살해되고 그의 시신은 14조각으로 토막나 온 나라에 흩어져 버린다. 이시스(Isis)는 그 시체 조각을 모두 다시 찾아 맞추어 최초의 미이라를 만들고 그의 성기(性器)를 살려 내어 관계하여 아들 호루소(Horuso)를 낳았다. 그리고 오시리스의 소생을 위한 의식을 거행한 결과 그가 소생하여 죽은 자들의 사후 세계의 왕이 되고, 호루소는 산 자들을 통치하는 현세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죽은 신을 애도하고 그 재생을 기원하는 오시리스 신앙은 농경문화와 결합되어 해마다 춘분이 되면 겨울에 죽었던 식물들이 되살아나는 것과 관련시키는 재생의식으로 지켜졌으며, 이러한 자연종교의 재생신앙이 영적 각성이라는 의미에서 영적 재생 신앙으로 밀교(미스테리아)와 영지주의에 의해 재해석되어 널리 유포되었다.

그러나 종교학자 내쉬(R. Nash)는 오시리스 재생 신화와 예수의 부활 신앙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분명한 차이점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①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다는 점, ②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해 죽는다는 점, ③ 단 한 번의 죽음이지 반복된 죽음이 아니라는 점, ④ 역사적 실제사건으로 처형당해 죽는다는 점, ⑤ 자발적인 죽음이었다는 점, ⑥ 그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다는 점이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1세기의 유대 땅 나사렛 사람 예수와 기원전 4500년경의 이집트의 신화적 인물 오시리스를 동일한 신화적인 인물로 여기는 것은 복음서와 고대 역사가들의 예수에 대한 기록과 오시리스의 신화를 이중 왜곡하는 것이므로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신화적 인물인 예수를 3세기의 기독교가 역사적 인물로 각색한 것이 아니다.

바울마저도 예수를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신화적인 인물로 보았는데,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지배자의 종교로 공인 되자 3세기의 유세비우스라는 역사가를 시켜 오시리스 신앙의 신화적인 인물인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 각색한 것은 ‘거대한 음모의 결과’였다고 주장한다(35쪽).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야 말로 바울의 생애와 유세비우스 시대의 역사를 저자들이 마음대로 각색한 ‘웃지 못할 음모의 결과’이다.

바울은 로마서 서론에서 예수를 가르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신(generatio) 분이며,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resurectio) 분”(로마서 1장 3절-4절)이라고 하였다. 예수는 오시리스 신화처럼 가현적인 인간(doceo)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다. 그리고 오시리스처럼 해마다 반복하여 재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단 한 번 부활하신 분임을 분명히 하였다.

더군다나 3세기의 기독교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신화적 인물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 각색했다는 주장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유세비우스보다 200년 전에 이미 예수는 역사적 인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상식이기 때문이다.

AD 70년을 전후하여 예수의 역사적 생애를 기록한 4복음서 외에도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AD76-79년 사이에 쓴 「유대고대사」와 「유대전쟁사」나,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P. Cornelius Thakitus AD. 55/56-120년경)가 쓴 「연대기」(15/14. 3.)에서도 유대 총독 빌라도에 의해 나사렛 사람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AD 170년경 헬라의 풍자 작가인 루시안(Lucian)도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현자(賢者)”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부정하고 예수를 신화적 인물로 주장하는 만용에 통탄할 일이다.

3. 예수의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이며, 산 자의 영적 부활(해탈)이 아니다.

저자들은 1946년 나그 함마디에서 발굴된 영지주의자들의 문서들을 인용하면서 예수는 고통을 겪지도, 피를 흘리지도, 죽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것”이 아니라고 적고 있다. 특히 영지주의 문서인 「빌립복음서」에 기록된 “먼저 죽고 난 다음에 다시 살아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틀렸다.… 죽고 나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부활해야만 한다.”는 영적 부활론을 기독교의 본래적인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영적 각성을 통한 영적 재생은 미스테리아 신앙의 핵심이며, 득도나 해탈과 같은 선불교적 특징과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동서양의 가장 보편적인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교회 내에도 이러한 영적 부활론자들이 존재하여 부활신앙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킨 것을 질책하였다.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합니까?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장 12절-13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우리의 믿음도 헛될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영적부활이나 영혼불멸설을 주장하지 않고,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을 가르쳤다. 바울이 영지주의자였다는 저자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저명한 신학자인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한국신학연구소, 1979)이라는 책에서 희랍의 미스테리아 신앙과 영지주의의 신관과 성서의 하나님 신관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명쾌하게 제시하였다.

고대 희랍신화에 나타나는 신은 고난과 죽음을 겪지 않는 무감정의 신(God of Apathos)이다. 고난을 당하거나 죽는 신은 육체의 굴레에 얽매여 있는 가멸적(可滅的) 존재이므로 더 이상 신일 수 없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이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 태어나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가르친다. 이는 희랍인들에게 너무나도 낯선 신앙이다. 히브리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하감하시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고난당하는 백성과 함께 하시는 인정이 많으신 하나님이다.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시므로 그 고난과 죽음을 극복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바로 고난받으심으로 고난을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결정적인 계시이다. 우리를 위하여 고난받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현실적인 고난에 항거하시고 고난을 극복하시고 승리하신 것이다. 그래서 몰트만은 “부활신앙이 아닌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고 신앙이라고 일컬을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20세기 대표적인 신학자 칼 바르트도 「죽은 자의 부활」(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89)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기독교의 부활신앙은 산자의 영적 부활이나 영혼불멸이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인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고난당하는 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의 육체적인 죽음과 죽은 자의 부활을 거부함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크게 왜곡한 것이다. 그래서 하르낙은 2세기에 기독교가 영지주의적 왜곡을 극복하지 못하였다면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못하였을 것으로 단언하였다.

4. 영지주의는 본래적 기독교가 아니라, 영지주의에 입각하여 기독교를 왜곡한 것이다.

저자들이 말하는 ‘미스테리아(密敎) 신앙’이 고대 유럽의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진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신앙이 기독교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어 역사적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독교신앙을 미스테리아 신앙과 혼합하여 영지주의 기독교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영지주의가 역사적 기독교를 영적 기독교로 왜곡한 것이지, 기독교(저자들의 용어로는 문자주의자들)가 영지주의를 문자주의로 왜곡한 것이 아니다. 영지주의의 주장을 조금만 살펴보면 저자들의 가설이 전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3세기의 기록으로 보이는 영지주의 문서인 「도마복음서」 25절에는 예수가 “형제를 여러분의 영혼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보다 2세기 이전에 복음서에서 기록된 “네 이웃을 네 몸(육체)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19장 19절 병행)는 말씀을 왜곡시킨 것이다. 육체로 말미암아 고통과 죽음이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육체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영혼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제멋대로 왜곡한 것이다.

심지어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외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구절을 영지주의적으로 해석한다. 아람어 엘(El)은 보통명사로서 신(神)이라는 뜻일 뿐만 아니라 영(靈)을 뜻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영(神)이 인간의 육체를 빌려 마치 유령처럼 이 땅에 나타났다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인간의 육체적 가면을 벗어버리고 다시금 영적 존재로 되돌아가려고 하자, 예수의 가현적인 육신이 “나의 영이시여, 나의 영이시여 어찌하여 나(육체)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초대교부들은 영지주의의 해악을 반박하는 많은 글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서 요한2서 1장 7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들” 즉, 영지주의자들을 가르켜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anti-Christ)”라고 하였다. 이처럼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육체로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고난도 죽음과 함께 당하지 않는다고 왜곡한 것을 바울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교훈”(고린도후서 11장 4절)이라고 분명히 밝힌 것이다.

5. 기독교신앙은 영지주의자들의 은밀한 미스테리아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선포된 사도전승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신앙의 핵심은 영육 이원론이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온갖 고난을 당하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육신의 감옥 속에 갇힌 영혼을 해방시킴으로서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다. 구원의 구체적인 방식이 비밀스러운 영적 지식(gnosis)를 깨닫는 것이며, 이 영적 지혜는 소수의 선택된 영지자들에 의해 비밀스럽게 전승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미스테리아 신앙은 밀교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종교학자들은 종교를 밀교(密敎)와 현교(顯敎)로 나눈다. 밀교는 교리와 제도와 의식이 이중적이다. 공개되는 부분과 비공개적인 부분이 있다. 통일교가 이러한 밀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핵심적인 교리와 제도와 의식은 핵심 내부인들에게만 은밀히 알려져 있다. 외부의 직접적인 비난이나 공격을 피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처음부터 예루살렘성전과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려서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다”(사도행전 2장 23절-24절, 36절)고 선포하였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지내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살아나셨다”(고린도전서 15장 3절-4절)고 하였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신앙에 대한 최초의 기록 역시 “내가 전해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는 것”(고린도전서 15장 1절)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초대교회 이레네우스는 「이단반박」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통해 영지주의를 반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공개적인 사도전승’이지만, 영지주의의 영지(gnosis)는 ‘은밀한 비밀전승’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밀교의 말로는 그 은밀한 비공개성 때문에 황당무계한 신앙을 저마다 제멋대로 전수하였고, 이러한 모순된 신앙에 대한 객관적 이성적 비판과 검증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적대적인 정부와 종교가 지배하는 체제에서도 자신들의 신앙의 진리성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였기 때문에 엄청난 비판과 도전과 박해를 당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의 진리성 때문에 역사적인 종교로 세계화의 기틀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은밀한 밀교는 불교처럼 엘리트적인 소수만의 득도와 수행을 통해 영적 각성에 이르는 것을 우월한 것으로 여겼다는 점도, 예수가 가난하고 무식하고 병들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의 구원을 위한 대중적인 신앙을 표방한 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6. 저자들의 주장은 명확성과 일관성이 부족하고 상호모순 투성이다.

저자들의 주장을 자세히 읽어 보면 논리적 일관성이나 명확성이 부족하며, 자체 모순이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사례 하나만을 들어보자.

서기 3세기의 한 부적의 그림을 근거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예수로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이교도 신인인 오시리스-디오니수스였다”(102쪽)고 했다가, 그 다음 페이지에서는 “최초의 십자가상에 나타난 예수는 곧 오르페우스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영지주의 문서인 「옹호자 도마의 책」을 인용하면서 예수와 모든 점에서 닮은 “예수의 쌍둥이 형제가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211 쪽)고 주장한다. 그리고 몇 페이지 뒤에는 영지주의 문서인 「위대한 새트신의 두 번째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뇨 사람 시몬이다”(215 쪽)고 하였다. 그렇다면 진짜로 십자가에 죽은 자는 누구인가?

문자주의자들이 각색한 음모처럼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문자 그대로 부활한 것이 아님을 반박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에 대해 이처럼 오락가락하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 저자들의 지적 수준이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정도의 한심한 책을 읽노라면 왜 이런 책을 민족정론을 표방하는 동아일보사가 분별없이 출판하였는지 그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여기에는 기독교 진리를 왜곡하고 기독교를 폄하하려는 저속한 의도가 있지 않나 의심스럽다. 동아일보사는 즉각 이 책을 전부 회수하고 기독교에 사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