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박사.

춘천시 금산리 서면 나의 시어머니 한석희 장로님(춘천중앙감리교회) 고향마을 회관 앞에는 500년 된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춘천시에서 보호목 1호로 지정한 이 나무는 둘레가 불과 100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한 뿌리에서 두 개의 가지를 뽑아올려 밑둥이에서 보면 영락없는 두 그루나무이다. 기록상으로 500년이라고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천년 고목으로 알고 있다. 외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에는 나도 명절날 그 곳에 종종 갔었는데 이 향나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실은 몇 번인가 보았을 터인데 관심을 끌 만한 나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억에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한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지금 3년째 노인전문 병원에 입원중이시다. 한평생 건강하셔서 병원을 모르고 사셨는데 90을 넘으시면서 신체의 모든 기능이 쇠약해져 기력을 잃으셨다. 입원 중인 지난해까지 혈압도 맥박도 정상이고 의식이 맑았기 때문에 유석근의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을 비롯하여 몇 권의 기독교 관련 서적을 읽으실 수 있었다.

일생동안 어머니의 독서량은 정말 대단하셨다. 무엇보다 내 글의 가장 애정 깊은 독자이셨다. 지난해 출간된 내 책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도 완전히 읽어주셨다. 그런데 지금은 맑은 의식에도 불구하고 종일 누워계셔야 한다. 돋보기를 쓰시고도 글을 읽는 것이 힘이 들고, 보청기를 끼셔도 소리를 분별하지 못하신다. 그리하여 올 설에는 집으로 모셔가지도 못하고 가족들이 모두 병원에서 세배를 드리게 되었다.

“어머니. 맘 편하게 기쁘게 오래오래 저희들 곁에 계셔 주세요.” 세배를 드린 후에 나는 이렇게 크게 쓴 글씨를 어머니가 보실 수 있도록 들어드렸다. 누워 계신 병실 창으로 새날 아침의 눈부신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그 순간 어머니의 시선이 창 밖을 향하여 먼 곳을 응시하더니 정원의 향나무 위에서 멈추어 섰다. 어린애 같은 두 눈에 향수에 젖은 듯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영혼이 얼마나 풍요로우며 놀랍고 풍부한 사랑을 창조해 오셨는지를. 그래서 지금도 어머니의 정신은 힘차게 공기 속을 운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얘야” 어머니는 내 손을 꼬옥 잡으셨다. 애기 손 같으나 차가웠다. “외할아버지 사시던 집 앞에 수백년 된 향나무 한 그루가 있다. 한 그루 이지만 사실은 두개의 나무와 같단다. 지금은 동사무소가 그 곳에 들어서 있지만 예전엔 모두 외가댁 땅이었다.” 그 순간 시간들이 어머니의 주름 깊은 얼굴에서 멈추어 서는 것 같았다.

“증조할머니께서 97세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 날 아침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저 향나무는 내가 시집올 때에도 저 모습 그대로 서 있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이다’” 어머니는 가늘게 한숨을 쉬고 지극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으셨다. “아무도 그 나무가 언제 잎을 털어내는지 나무껍질이 뚜거워지는지 모른다.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 외엔 어떤 변화도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라고.

이런 연유로 해서 나는 설날 아침에 어머니의 나무(어머니가 말씀해주신 그 나무)를 찾아 서면으로 갔던 것이다. 명절날 이른 시간이어서 거리에는 사람들의 통행이 끊기고 정적이 깊었다. 의암호에도 매서운 바람이 눈발을 휘날리며 불어왔다. 마을 입구에는 한승수 국무총리 내정자를 축하하는 프랭카드가 수십 개나 줄을 이어 펄럭이고 있었다. 어머니 집안의 경사일 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 역시 큰 경사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마을에는 희망의 기운이 깃발과 함께 펄럭이는 것 같았다.

나는 놓치고 지나쳤던 향나무 앞에 섰다. 날씨 탓인지 나무는 힘없이 쪼그라들어 볼품이 없었다. 그 순간 어머니가 입원해 계신 세윤 클리닉의 윤형구 원장님 말이 떠올랐다.
“한석희 할머니는 보통 노인들의 특징인 어린이 같은 막무가냄이 전혀 없어요. 여전히 남을 배려하고 무섭게 인내하며 감정을 절제하고….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평온하고 부드러운 얼굴이 되시는거예요.” 윤 박사님은 어머니께 매우 각별하시다. 나는 목이 메었다.

이 늙은 나무는 오래사는 것에 대하여 기쁨을 느끼지도 일찍 죽는 것에 대해 슬픔을 느끼지도 않는다. 풍성하다고 자랑하지도 보잘것 없다고 수치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이 나무에게는 삶과 죽음이나 부유함이나 가난함이나 똑 같은 것이다. 마치 지금의 어머니의 모습처럼.

누군가가 그랬다. 끝없는 바다는 뜨거워지지 않고도 끓을 수 있고 큰 강은 차가워지지 않고도 얼 수 있다고. 어머니는 인간의 마지막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바로 그렇게 냉정을 유지하고 계신다. 그렇게 완전함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사람은 바람을 타고 달려 별 속으로 올라가면서도 생사에 대해 냉정할 수 있다.

어머니는 40대에 장로로 부르심을 받아 여러차례 여선교회 회장과 속회 임사를 거치면서 목사님을 보필하고 성도들을 돌보며 교회를 섬겨오셨다. 어쩌면 춘천 중앙감리교회의 부흥은 반세기동안 하루도 빠짐없었던 어머님의 새벽기도의 열매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하늘나라에 가신 다음에도 내 속에서는 이 나무처럼 하나의 의미가 되실 것이다. 울음을 삼키며 나는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영원을 사모하는 아름다운 사람…^^ 바람도 울며 지나가고 있었다.

-송영옥 박사는

<한국수필>에서 수필로, <문단>에서 단편소설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국제 PEN클럽 정회원이다. 창작집으로는 <미운 남자>, <하늘 숲>, <해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閃 囚구를 떠돌고 쏀덛>,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와 영한시집 , 그리고 문학이론서 <기독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세종대, 미국 텍사스 주립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경북대 대학원에서 헨리 제임스 전공으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75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는 Y's Man International에서 국제여성부장(International Director for Y'Menettes)을 두 차례 역임했고, 신문·잡지의 연재계약으로 전 세계 60여 나라를 여행, 문화 예술 기행을 했다. 현재 대신대에서 기독문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