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박사(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한반도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면서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 가운데 하나가 생명에 대한 존중사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록 동양적 사상의 근저에는 모든 생명체는 공생적 또는 상생적 생명체로 필히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고가 흐르고 있지만, 구한말 상황에서는 전혀 설득력을 얻지 못하였다. 반상(班常)과 남녀노소(男女老少)의 엄격한 차별로 대표되는 왜곡된 유교문화의 만연으로 생명경시의 풍조가 극에 달했던 것이다. 어떤 형태의 것이든지 차별문화가 있는 곳에는 항상 생명경시의 풍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입된 기독교는 생명경시의 풍조와 결연히 싸워나갔다. 특히 그러한 세태(世態)의 배후에는 한국사회의 각종 차별문화가 자리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재한선교사들과 한국인 신자들은 “만민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라는 말씀을 갖고 그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 희망의 돌파구를 찾아볼 수 없던 한국사회를 근원에서부터 바꾸는 “소리 없는 혁명”의 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차별문화가 빚어내는 생명경시의 풍조를 점차 잠재우며 평등문화에 기인한 생명존중의 기틀이 마련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물론 그러한 생명존중의 문화형성에는 선교사들이 보여준 희생적 삶의 모습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한 순교자적 삶의 모습들을 통해 한국인 신자들도 삶의 자리에서 생명존중의 삶을 실천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삶의 한 전형을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 1858-1902)의 죽음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에 제물포를 도착했다. 그가 타고 온 배에는 임신한 부인과 장로교의 언더우드(1859-1916)가 동승하였다. 그때 아펜젤러는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여기 도착했습니다. 이 아침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광명과 자유를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다 [GAL (1885), 328]. 이 민족을 억누르고 있던 어둠의 권세를 보았으며, 능히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그것이 깨뜨려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펜젤러가 자신의 뼈를 묻게 될 땅에 도착하여 처음 보았던 비전이었다.

아펜젤러가 한국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것은 1883년 10월 코네티컷의 하트포트에서 열렸던 전국신학교동맹(ISA) 대회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한국 선교를 함께 시작하게 되는 언더우드와의 만남도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아펜젤러는 자신의 일기에 “나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봉사하는 데 완전히 헌신하는 것이다”(1881. 2. 26. 주일)라고 기록할 정도로 주님을 위한 열정으로 가득 찼던 젊은이였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아펜젤러가 한국의 선교사로 나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는 밝은 장래가 약속된 젊은이가 왜 아무런 희망도 없는 한국에서 자신을 썩히려고 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아버지는 “자신을 내던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하며 심하게 나무랐고, 아들이 한국에서 익사하는 꿈과 환상을 보았던 어머니 또한 불안해하며 못마땅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주님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드리기로 작정한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이후, 아펜젤러는 불신만 가득한 황무지를 일구며 희망의 싹을 틔우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장의 벽돌에서 완성되는 건물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그리고 쓰레기더미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 아펜젤러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한국에 기초가 없고, 오히려 가톨릭에 의해 나타난 것처럼 기독교에 대한 불신만이 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우상숭배와 미신과 관습과 같은 쓰레기들을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놀리고 있는 땅을 갈아야만 한다. 우리가 좋은 열매를 보기 원한다면 또한 깊이 갈아야 한다.”

아펜젤러가 불신의 땅에 믿음의 싹을 틔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가는 그의 외적인 변화에도 드러난다. 그는 내한할 당시 90kg가 넘는 거구였지만, 15년 후에는 체중이 60kg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두번째 안식년 때는 머리가 희고 허리는 굽어서 가장 친한 친구조차도 그를 못 알아볼 정도였다. 그의 순교적 삶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아펜젤러의 순교자적 삶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한국인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짐으로써 순교자의 삶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사건은 1902년 6월 11일 밤 10시경 군산 앞바다 어청도 근처에서 일어났다. 당시 아펜젤러는 한국인 비서와 목포가 고향인 한 여학생 등과 함께 오사카선박회사 소속의 쿠마가와호를 타고 목포로 항해하고 있었다.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그 배에는 미국인 탄광기술자 보울비도 타고 있었다.

그런데 아펜젤러 일행이 타고 있던 배가 어청도 부근을 지나던 중 키소가와호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는 보울비와 대화를 마치고 막 자기 선실로 돌아와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배는 침몰하기 시작했고, 보울비는 겨우 구명보트를 잡을 수 있었다. 보울비는 아펜젤러도 충분히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있었지만, 한국인 비서와 그 여학생을 구조하기 위해 선실로 뛰어가는 바람에 그 기회를 놓쳤다고 증언한다. 결국 그는 구조되지 못하고 23명과 함께 깊은 바다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국인의 목숨을 구하려다가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펜젤러, 그는 한국 민족에 한국인보다 더 많은 희망을 가졌던 사람이다. 아니 그는 한국인조차도 자신의 민족에 대해 아무런 희망을 갖지 못하던 시대에 한국 민족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때문에 그는 한국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불신과 냉소, 그리고 좌절의 시대정신 속에서 누가 이 민족을 위한 희망의 싹을 틔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