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강변교회 담임)

유럽 각처에서 일어난 다양한 종교개혁운동은 각각 독특한 주장과 특성을 지니면서 발전해 나아갔다. 쮜리히에서 일어난 쯔빙글리(Zwingli)의 개혁운동과 제네바에서 일어나 칼빈의 개혁운동을 가리켜 “개혁파”(the Reformed) 개혁운동이라고 부른다. 이는 그들이 루터의 개혁운동을 보다 철저히 개혁했다는(reforming Lutheranism) 의미에서였다.


스위스의 개혁자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는 1484년 1월 1일 스위스의 빌트하우스(Wildhaus) 마을 서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젤, 베른, 그리고 비엔나 등지에서 인문주의를 공부했고 1502년에는 바젤로 돌아가 그곳에서 신약을 공부했다. 1504년에 문학사 학위와 1506년에 문학 석사 학위를 획득했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으나 1506년 글라루스(Glarus)의 교구 신부가 되어 10년간 목회에 종사했다. 그동안 그는 헬라어 히브리어 그리고 성경과 교부들을 연구했다. 1515년에는 에라스무스와 교제하면서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516년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하자 그는 성경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바울 서신을 헬라어로 암기할 정도였다.

쯔빙글리는 1518년 쮜리히의 회중 사제로 초빙받아 그곳으로 옮겨간 후 1519년 1월부터 마태복음 강해 설교를 시작했고 이어서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의 강해 설교를 했다. 그의 참신하고 활기에 넘치는 설교와 교회의 미신적 요소들에 대한 비판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쮜리히에 옮겨온 후부터 쯔빙글리의 서신 가운데는 루터의 이름이 나타나는데 그는 루터의 개혁운동을 배우기를 원했고 루터의 저술을 입수하여 읽으며 루터를 예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후에 그가 루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그는 루터를 알기 이전부터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루터가 개인적인 처절한 종교적 갈등에서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면 쯔빙글리는 성경 연구와 초대 교부 연구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성경이 금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비해 쯔빙글리는 신·구약성경이 구체적으로 제정한 것만을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루터 못지않게 성경 번역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으니 신·구약성경 전부를 쮜리히 방언으로 번역했다.

1517년 루터가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제시했을 때 쯔빙글리는 아직 종교개혁자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개혁운동에 전환점을 제공한 것은 1519년 8월의 흑사병이었다. 1519년 9월 쯔빙글리는 흑사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이 경험은 그의 신학이 보다 진지한 개인적인 성격을 띠게 했다.

1519년 전염병이 스위스 전역에 확산되었을 때 쮜리히의 세 교구 안에서만도 1500여명이 사망했다. 쯔빙글리는 질병의 시초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주 하나님이여 도우소서. 이 고통 중에 있는 나를 도우소서. 죽음이 문턱에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시여, 당신께서는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당신에게 부르짖습니다.” 쯔빙글리는 질병의 와중에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주 하나님이시여 위로하소서. 위로하소서. 병이 심해집니다. 고통과 두려움이 내 혼과 몸을 사로잡습니다. 나에게 오소서. 지금이야말로 나의 싸움을 당신께서 수행하실 시간입니다.” 병이 회복되어 가는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주 하나님이시여 회복되었습니다. 회복되었습니다. 나는 이미 회생되었습니다. 죄악의 찌끼가 나를 지배하지 않는 것이 당신의 뜻이옵니다. 내 입술은 이제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의 교훈을 선포할 뿐입니다.”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은 1522년부터 쮜리히에서 조용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의 내적 확신이 강하게 밖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성경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기로 작정한 쯔빙글리의 결의는 그로 하여금 가톨릭교회가 제정해 놓은 금식일과 사순절 기간 동안의 음식법을 공격하게 만들었다. 그는 교회가 제정해 놓은 음식법은 신약 성경이 제정해 놓은 것이 아니며 사도 바울이 정죄한 유대주의의 음식법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쯔빙글리의 추종자들은 1522년 사순절 기간에 돼지고기와 소시지를 먹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1523) 쯔빙글리는 교회의 화상(images)들과 성자들의 성상들(statues)과 심지어 십자가 형상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교황 제도, 미사 제도, 성지순례, 성직자의 독신 제도, 수도원 서약 등의 제도를 비 성경적이라고 부인했다. 이와 같은 것은 칼슈타트의 주장과 비슷했다. 칼슈타트와 마찬가지로 쯔빙글리는 교회 안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것도 금했다.

쯔빙글리는 또한 로마 교회의 성찬관인 화체설을 부인하며 칼슈타트와 같이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을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쯔빙글리가 성상과 음악과 성찬을 배격한 것은 외적이고 육체적인 방편이 은혜의 전달 매개체로 부적당하다는 그의 신념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유래했다고 하겠다. 쯔빙글리는 성찬과 세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성찬 자체가 신비적으로 은혜를 가져 온다는 가톨릭 교회의 화체설과 루터의 공재설을 부인하고 성찬을 하나의 ‘기념’으로(as a memorial) 간주했다.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은 차츰 다른 개혁 운동과 갈라지게 되었다. 쯔빙글리는 대부분의 신학적 문제에 있어 루터와 견해의 일치를 보았으나 성찬 문제에 있어서 심한 견해 차이를 보아 결국 갈라서게 되었다. 즉 루터는 그리스도가 성찬 속에 ‘함께’ 임한다고 주장했는데 비해 쯔빙글리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성찬을 거행할 때 성찬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임재한다고(공재설) 주장했는데 쯔빙글리는 이를 거부하고 성찬은 순전히 영적 및 상징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교제는 1529년에 파국에 이르렀고 교회의 연합은 깨어지고 말았다.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은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 쯔빙글리는 교회의 개혁 못지 않게 스위스의 독립과 평화를 중요시하며 쮜리히의 정치적 세력을 공고히 하려고 노력했다. 가톨릭의 정치적 압력에 대항하여 독일 루터파 제후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것은 루터의 정종 분리의 입장과 대조적인 입장이었다. 쯔빙글리는 택함을 받은 백성들의 개념에 근거하여 “개신교 신정 정치”(a Protestant Theocracy)의 이념을 내세웠다. 쮜리히 시는 차츰 선택받은 백성의 도시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들과 후손들을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는 거룩한 나라를 이룩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쮜리히는 1531년 10월 가톨릭 세력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쮜리히 군에 가담해서 싸우던 쯔빙글리는 수십 명의 설교자들과 수많은 군인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스위스 안에서 개혁운동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