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한국교회의 전도 열정은 급격히 냉각되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공산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반선교사운동, 그리고 세계적 조류에 편승하여 붐처럼 일어났던 기독교 사회복음운동 등이 크게 작용했다. 이러한 교계의 이상 저온현상은 이용도, 백남주, 유명화, 황국주와 같은 열광적 신비주의자들의 발흥이라는 기현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1년 대거 전진운동의 일환으로 출범한 성결교회의 장막전도대 운동은 교계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당시 교계의 대표적인 문필가였던 김린서는 이 운동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근래에 어느 교파를 물론하고 전도의 열심이 냉각한 것이 근심되는 금일에 전 조선에 출동하여 헌신적으로 전도하는 용감한 신앙운동에는 칭탄(稱歎)하지 아니할 수 없다.”(「신앙생활」, 1932. 6). 따라서 장막전도대 운동은 곧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특별한 부흥운동이 되었다.

이 장막전도대 운동의 중심에는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정남수(1895~1965) 목사가 있었는데,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최근에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당시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신진 신학자가 여건이 좋은 일자리를 마다하고 순수한 신앙운동을 전개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교계의 분위기는 외유 신학자들의 신앙에 대해 매우 염려스러운 시선을 보이고 있었고, 실제로 그러한 염려가 사실로 드러나는 빈도가 점차 많아지고 있었다. 그러한 차에 신진 외유 신학자인 정남수가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순복음 신앙운동에 뛰어들었으니, 당시 교계가 받았을 신선한 충격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남수 목사의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이다. 강서는 옛 고구려의 정기가 가득한 곳으로 한국근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던 도산 안창호와 고당 조만식 선생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정남수가 살던 마을에는 1907년 대부흥운동의 여파로 기독교 복음이 전해졌고, 그의 할아버지가 마을의 첫 기독교 신자였다. 그 영향으로 정남수도 13세에 세례를 받았으며, 그 마을에 복음을 전해 준 헌터 선교사가 세운 소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마을을 방문한 도산 안창호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정남수는 대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거기서 1년 정도 수학하던 중 도산이 옥고를 치르게 되자 그의 옥바라지를 맡기도 했다. 그러다가 도산이 출옥 후 도미하게 되자 그 길을 따라나섰다. 물론 의사가 되려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도산을 도와 흥사단의 창단에도 참여하는 한편, 의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영어 공부에도 매진했다. 그러던 중에 미국 성결운동의 지도자이며, 애즈베리대학 학장이던 모리슨(H. C. Morrison)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에 극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모리슨의 도움으로 애즈베리대학에 들어간 그는 그곳에서 열린 부흥집회에서 온전한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고, “전 생애를 바쳐 전도자로 헌신하라”는 주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때부터 “모든 열방을 그리스도께! 영혼이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 (All the World for Christ! Give Me Either Soul or Death!)라는 구절은 그의 삶과 신앙의 모토가 되었다.

이후 모리슨 박사는 종종 그를 자신의 부흥집회에 데리고 다니면서 간증과 설교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며, 그러한 과정을 거쳐 정남수는 부흥사로 훈련되어 갔다. 그의 불을 뿜어내는 부흥회는 곧 미국의 성결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들은 정남수에게 “한국의 빌리 선데이”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빌리 선데이(Billy Sunday)는 야구선수로 있다가 전도자가 된 유명한 대중적인 부흥사로,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다고 할 정도로 미국교계에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러한 인물에 정남수를 비견할 정도로, 미국교회 신자들이 그의 부흥회를 통해 받은 감동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이처럼 미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정남수는 고국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라는 음성에 순종하여 1926년에 귀국했다. 이후 미국교회의 후원을 얻어 장막전도대 조직하여 활동하던 그는 아현교회의 부흥회를 계기로 1931년 성결교회에 입회했다. 자신의 신앙적 색깔이 성결교회와 같았기 때문에 합력하여 구령운동과 성결운동에 진력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성결교회는 정남수를 최고 의결기관인 5인 이사회의 일원으로 추대하는 한편, 장막전도대 대장으로 임명하여 그가 받은 은사대로 전국을 누비며 부흥운동을 이끌도록 했다.

그가 선봉에 섰던 장막전도대 운동은 약 6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텐트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는 특히 날씨에 크게 좌우되는 거리 집회의 위험성을 최소화해 주었고, 청중의 집중도를 높여 주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들여온 트럭으로 기동성이 확보되어 전국의 주요 도시를 빠르게 순회하며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또한 자동차 위에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시내를 일주하며 선전하는 악대를 동원한 부흥회 홍보는 또 하나의 장관을 이루었다.

따라서 장막전도대 운동은 곧 세간의 명물이 되었고, 그 활약은 대단히 눈부신 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회개와 성령충만의 역사가 일어났으며, 그 광경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와 방불할 정도였다. 동시대의 이건 목사는 집회마다 “전에 보지 못했던 또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회개의 역사와 성화의 맹렬한 폭발적인 역사 일어난다”고 증언한다. 실제로 장막전도대가 3-4년 동안에 거둔 열매는 2천 3백여 집회에 결신자가 3만명이 넘었고, 신설교회만도 60곳에 이를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이 운동을 통해 가일층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게 되었고, 일제말의 수난을 견뎌내는 힘을 비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