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대표, 강변교회 담임)

“라이프찌히 논쟁”


루터와 로마교회 사이에 벌어진 가장 큰 논쟁이 1519년 7월 4~14일까지 라이프찌히(Leipzig)에서 행해진 라이프찌히 논쟁이었다. 로마교회측에서는 잉골슈타트(Ingolstadt)대학의 교수 존 에크(John Eck)를 비롯하여 잉골슈타트 대학과 라이프찌히 대학의 교수들이 참석했고, 루터측에서는 루터를 비롯하여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 칼슈타트(Carlstadt)와 멜랑톤(Melanchthon) 등이 참석했다.

에크가 먼저 도착하여 라이프찌히 시의회가 제공한 76명 호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시가를 왕래했다. 비텐베르그 일행은 며칠 뒤 도끼로 무장한 200명의 학생들과 함께 도착했다. 토론이 라이프찌히 성의 강당에서 벌어졌다.

첫날 모든 사람은 성 토마스 교회의 여섯 시 미사에 참석했고 오후에는 회의 진행에 관한 규칙들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한 증인은 당시 논쟁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르틴은 중간 키에 걱정과 연구로 몸이 야위어서 살갗 위로 드러난 뼈를 거의 다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남성적 힘에 넘쳤고 가슴에 파고드는 힘찬 목소리(clear, penetrating voice)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학문이 풍부했고 성경을 손 끝에 잡고 마음대로 구사했다. 그는 다정하고 친절했으며 완고하거나 오만하지 않았다. 칼슈타트는 루터보다 키가 더 작고 얼굴은 찌들은 청어(smoked herring) 모습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굵고 불쾌했다. 그의 기억력은 더디었으나 성내는 데는 급했다. 에크는 가슴팍이 벌어진 육중한 몸과 독일어 악센트의 힘찬 목소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하지 못했고 오히려 거칠었다. 그의 두 눈과 입과 얼굴 전체의 모습은 신학자라기 보다는 백정(butcher)을 연상하게 했다.”

칼슈타트와 에크가 일주일 동안 인간의 타락에 대한 논쟁을 벌인 후, 루터와 에크는 교황의 권위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에크는 로마 교회와 교황의 신적 권위를 내세우며 “나는 로마 교황을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높이 존경하오”라고 말했다. 그는 로마 교황의 우위성을 주장하며 1세기의 교서를 내놓았다. 그 교서의 내용은 “로마 교회는 그 우위성을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으로부터 직접 받았으므로 다른 모든 교회와 신자들보다 탁월한 권세를 누린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나는 이 교서들을 배격하오. 거룩한 교황과 순교자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결코 없소.” 루터의 이 말은 옳았다. 이 교서는 허위 문서로 알려진 이시도리안 교서들(Isidorian decretals)에 속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로렌조 빌라의 도움을 입지 않고 ‘역사 비평’을 훌륭하게 해낸 것이었다. 루터는 로마 교황의 우위성을 주장한 것이 400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초대 교회와 처음 1,100년 동안은 주장되지 않았다고 지적했고, 그리고 그것이 비성경적임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에크는 루터로 하여금 위클리프와 후스의 입장을 시인하도록 유도했다. 에크는 꼬집어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정죄받은 위클리프의 오류를 그대로 따른다는 말씀이오? 그는 로마 교회가 우위인 것을 인정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또한 베드로가 로마 교회의 머리됨을 부인한 요한 후스의 악질적인 오류를 그대로 따르고 있소?”

이에 대해 루터는 처음에는 적극적인 반박을 하지 못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보헤미아인들의 주장을 배격하오. 나는 그들의 분열을 한 번도 인정한 일이 없었소. 그들이 교회에서 떠나지는 말았어야 했소.” 그러나 점심시간이 되어 회의가 정회되자 루터는 대학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후스를 정죄한 콘스탄스 회의(1414-18)의 기록을 찾아 보았다. 놀랍게도 그가 정죄 받은 조목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일하고 거룩한 보편적 교회는 택함을 받은 자들의 무리이다. 보편적인 거룩한 교회는 하나이다.”

오후 2시 회의가 계속되었을 때 루터는 이렇게 선언했다. “후스가 내세웠던 조항들 중에는 교회가 정죄할 수 없는 참으로 기독교적이고 복음적인 것이 있음을 발견했소.” “로마 교회가 우위인 것을 인정하지 아니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진술이 위클리프의 것이든지, 후스의 것이든지 나는 상관하지 않소. 로마의 우위를 인정하지 아니했던 수많은 희랍 사람들도 구원 얻은 사실을 나는 알고 있소.”

이에 대해 에크는 “네가 만약 후스와 위클리프의 입장을 변호한다면 너야말로 이단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이며 참으로 어리석은 자이다” 라고 소리쳤다. 루터는 다시 “종교회의도 가끔 잘못을 범한다. 종교회의들을 보라.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 많지 않은가? 성경으로 무장된 평신도가 오히려 교황이나 종교 회의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 성경 때문에 우리는 교황과 종교회의를 거부해야 한다” 라고 단호하게 맞섰다.

에크는 “이것은 보헤미아의 병균이다. 이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라고 한탄했다. “만약 그대가 콘스탄스 회의를 거부하고 합법적으로 소집된 종교회의가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나에게 이방인과 바리새인과 마찬가지이다.”

루터와 에크가 다룬 두번째 논제는 연옥(purgatory)에 관한 것이었다. 에크는 구약 외경 마카비 2서 12:45,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 속량을 이루므로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를 인용하면서 연옥의 실재를 주장했다. 루터는 마카비서가 구약 정경에 속하지 않고 외경에 속하므로 권위가 없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논쟁의 고장에서 교서와 종교회의의 권위를 부인했고 이제 외경의 권위도 부인했다.

그들이 다룬 세번째 논제는 면죄부(indulgence)와 고해(penance)에 관한 문제였다. 그러나 면죄부 자체에 대한 토론은 없었다. 그러나 고해 문제에 대해서 에크는 계속 루터를 공격했다. “교회는 모두 잘못을 범했고 그대만이 무엇을 참으로 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루터는 답변했다. “하나님은 당나귀를 통해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겠다. 나는 기독교 신학자다. 나는 내가 믿는 진리를 피 흘려 죽기까지 변호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그 진리가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선언되었든지 이단에 의해 되었든지 상관치 않고 종교 회의가 인정하든 부인하든 간에 나는 진리만을 고백하겠다.”

논쟁은 18일간 계속되었다. 논쟁 후에 프라그(Prague)에 있는 후스파 지도자들로부터 두 통의 편지가 루터에게 보내졌다. “후스가 한때 보헤미아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 그대 마르틴이 삭소니에 있오. 굳게 서시오!” 편지와 함께 후스의 저서 「교회에 대해서」(On the Church) 한 권이 도착했다. 루터는 고백하기를 “라이프찌히에서 보다 나는 지금 후스의 입장에 더 많이 동의한다”고 했다.

1520년 2월에는 “모르든 알든 우리는 모두 후스파다” 라고 선언했다. 에크는 이때 로마에서 교황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죄악의 자식(son of iniquity)이 이제는 삭손의 후스(the Saxon of Hus)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