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존스 선교사

초대교회에서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어 자라나게 했다. 아펜젤러가 한국 선교의 터를 닦았다면 조지 존스 선교사(한국명 조원시·趙元時)는 그 터 위에 전도와 교육 전반에 걸쳐 괄목할만한 업적을 쌓았다.


한국에서 존스 선교사는 개척 선교단의 일원으로 서울과 인천에서 개척 선교사로서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아펜젤러가 1902년 해상 조난 사건으로 별세하고, 스크랜튼이 1907년 선교사직을 사임함으로 한국 선교가 위기에 처했을 때 선교 관리자로서, 지방 장로사로서 그 직분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인천내리교회(김흥규 목사)는 18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창립 120주년을 맞이하여 '조원시의 한국선교'란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 인천 강화 및 경기 황해도 지역선교를 위해 헌신한 존스 선교사의 신학사상과 사역에 대해 집중 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날 학술세미나에는 감리신학대학교 이덕주 목사, 천안대학교 성백걸 목사, 죽림교회 김진형 목사, 새누리교회 조이제 목사, 인하대학교 박철호 전도사가 참석하여 각각 <조원시의 신학사상>, <조원시와 신학교육>, <조원시와 하와이 이민>, <조원시와 문서선교>, <조원시와 선교기지>란 주제로 발표했다.

▽최연소 선교사, 가장 뛰어난 한국어 실력 갖춰= 먼저 감신대 이덕주 교수는 존스 선교사에 대해 "한국에 온 선교사 중 제일 나이가 어린 선교사로 한국 초기 선교사 중 조선어에 가장 능통했다"며 "또한 그는 미국 대학에서 비교종교학 교수로 초빙을 받을 정도로 한국의 역사와 종교 문화와 풍속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학자였다"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존스 선교사는 소개될 때마다 최연소 선교사(the youngest missionary)'란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녔으며, 그가 내한하였을 때의 나이는 정확하게 20세 9개월이었다"면서 "존슨 선교사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선교사로 나와 활동하였기에, 다른 선교사들이 모국에서 받는 대학수업을 피선교지인 한국에서 받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존스는 선교에 필요한 한국어를 비롯하여 한국의 전통 종교와 문화, 역사를 대학 과정처럼 배웠으며, 대학 수업을 하듯 한국어를 공부하였기에 그는 다른 어떤 선교사보다 뛰어난 한국어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와함께 한국 종교와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얻게 되었다.

이 교수는 "특히 존스의 한국 종교 연구는 미국 대학에서 비교종교학 교수로 초빙할 정도의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며 "동료 선교사 케이블(E.M. Cable)이 지적한 대로 존스는 한국인과 한국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선교사 공동체, 넓게는 세계에 아주 희귀하고 가치 있는 논문들을 썼다"고 설명했다.

1906년 일리노이주 웨슬리안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Doctor of Divinity) 학위를 그에게 수여한 것도 이러한 그의 학문적 업적을 인정한 결과였다.

▽서구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나침반= 존스 선교사의 선교 활동은 복음 전도와 교육 분야에 집중되었다. 내한해서 처음 5년 동안 서울의 배재학당에서 교사로 활약하였고 1893년 이후 10년 동안 인천을 거점으로 경기도와 황해도 지역에 많은 교회를 개척했다. 존슨 선교사가 안식년 휴가를 다녀온 1907년 이후에는 감리교 협성성경학원(오늘의 감리교신학대학교) 원장으로서 초기 토착 전도인들을 대상으로 한 신학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교수는 "존스의 신학 교육과 저술 활동은 한국 토착교회의 신학형성의 기반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서구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나침반이 되었다"며 "그를 통해 한국의 문화 전통과 서구 기독교 전통이 만나게 되었으며, 또한 그는 그 만남의 결과로 형성된 신학을 토착 전도인과 후배 선교사들에게 가르쳤다"고 밝혔다.

또한 이 교수는 "최근 존스의 신학의 형성 과정과 내용이 주목되고 있다"며 "이는 남·북 감리교 합동으로 운영하였던 협성성경학원 초대 원장으로서, 감리교 목회 지원자들의 신학 교육을 관장했던 존스의 신학이 곧 한국 감리교회 신학의 맹아(萌芽)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새누리교회 조이제 목사는 "존스는 감리교회에서 손꼽히는 뛰어난 저술가였기에 그의 활동을 인천이란 한 지역 혹은 감리교회란 한 교파에 국한할 수 없으며, 또한 존스의 활동으로 한국인은 새로운 세계를 깨우쳤고 신앙의 토대를 굳게 다지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며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의 모교회를 대상으로 한 글에서는 당시 한국 교인들의 상황과 교회의 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게 함으로써 존스는 기독교 세계관과 서구의 새로운 문명을 도입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서구에 소개함으로 동서문화의 교류에도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존스의 초기 한국개신교 신학교육 의미와 그 성찰= 천안대학교 성백걸 목사는 존스의 초기 한국개신교 신학교육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로 "존스는 초기 한국기독교인들을 본토 교회 지도자로 양성해내려는 열의가 있었다"며 "존스의 신학교육은 초기 한국교회가 건강하게 뿌리내리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기독교 복음과 진리를 적극적으로 소개해주었다는 교회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발제했다.

성 목사는 "19세기 말 동양, 동아시아의 종교전통과 문화풍토와는 다른 주로 서구 지역에서 형성되어 자기 역사를 전개한 낯선 근대 기독교가 당시 조선에 들어오게 되자,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조선인들이나 전하려는 선교사들에게 모두 필요한 것이 기독교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신학교육 과정이었다"며 "따라서 존스의 초기 신학교육과정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먼저 '근대 기독교의 자기소개'에 둘 수밖에 없었고, 신학교육에 종사했던 선교사들의 주요 관심이 또한 여기에 맞추어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성 목사는 존스의 초기 신학교육은 "처음부터 연합정신의 기초 위에서 진행되어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형성하는 데 연합과 합동의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토대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며 "북감리교회에서 운영하던 신학회에 남감리교회 학생이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 존스이 감리사 대리가 되어 실시한 1899년 2월 신학회부터였고, 아울러 1906년 협성성경학원 설립 시에는 '연합의 기초'라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여 이후 남북감리교회가 연합하여 한 신학교에서 공부한 목회자들을 양성함으로써 이것이 조선감리교회 설립의 씨앗이 되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