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규 박사(대신대학교 한국교회사)

심양에 있는 조선인 교회 서탑교회(西塔敎會)는 중국 료령성 심양시 화평구 시부대로 37호에 있는데 곧 100년을 맞이하게 되는 역사있는 교회다.


필자가 중국 선교유적지 탐방 중 서탑교회를 방문한 것은 지난 1일 오전 9시경이었다. 새건물 바로 옆에 있는 일제하에서도 조선인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가꾸어가며 나라 잃은 설움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눈물뿌린 역사의 상흔이 서려있는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야트막한 교회건물이 우리를 반겼다.

겉모습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종탑에 십자가가 있고 현관이 중앙에 있는 30평 정도의 작은 예배당이 쓸쓸히 서 있는 것 같았으나 바로 옆에 1993년 7월 3일 헌당된 대지 250㎡ 건평 4,000㎡ 6층 콘크리트 건물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을 실증이나 하듯 모체건물교회를 넓은 가슴으로 포용하고 있는 것 같아 더욱 우리 방문 일행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었다.

장신대신학대학원 출신 부목사인 오명봉(吳明峯) 목사의 서탑교회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복음은 곧 생명이요 생명은 살아 움직이며 성장해 많은 열매를 맺고야 만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하였다.

담임목사인 오애은 목사는 70세가 넘은 고령의 여자 목사였으나 일제때에는 서탑교회 집사였고 공산혁명 아래에서 교회를 신앙으로 지켜온 여장부였다. 서탑교회는 1913년 5월 봉천 (오늘의 심양) 대화구 대화가 15의 3번지에서 20여명의 신도로 시작되었는데 그 후 조선 평북 의주군교회 여전도회에서 김덕선 목사를 파송해 사역하게 하였고 뒤이어 의산교회에서 김병룡, 조영승, 양분식, 백영엽, 리철락 목사님을 파송하였는데 백영엽 목사 시무시 지금의 구 예배당을 건축하였다고 했다.

교회가 건축된 후 당시의 신자수가 200여명으로 성장하였다. 1931년부터 일본의 투항시까지는 정상인 목사가 시무하였는데 봉천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동북신학원과 성경학원, 보육학원, 영광잡지사, 유치원 등을 시작, 교육선교에 전력하였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는 연세대학교 교수 및 교목을 역임한 백리언 목사가 시무하였는데 중국 공산당이 심양에 진입함으로 부득이 12명의 장로들과 함께 남한으로 중국에서 철수하였다.

1948년 11월부터는 남은 신도 20여명을 김석윤 장로의 인도로 겨우 교회의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1951년 봄에는 이 서탑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이유는 공산당의 종교탄압과 종교말살정책의 결과였다. 이후 1980년 9월에 이르기까지 약 30년간은 마치 어두운 터널을 지나듯 많은 어려움과 시련 그리고 고난을 겪는 서탑교회 시련기간이었다.

그동안에는 성결교회 이성봉 목사가 시무하던 신도 50여명과 중국 침례교 교인들과 함게 예배를 드리며 어렵게 교회의 명맥을 유지해오던 중 1957년 7월 당시 이 교회의 여집사였던 오애은 전도사가 신학원(東北神學院)을 졸업한 후 조선족 신자들을 모아 따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오애은 전도사가 1981년 봄 드디어 목사안수를 받고 오늘까지 계속 시무하고 있던 중 중국문화혁명이 일어나 이렇게 따로 드리던 예배마저 금지당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역자들은 모두 검거되어 공장의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1979년 서탑신앙공동체의 예배가 금지된 지 13년 교회를 빼앗긴 지 30년만에 교회를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고 1980년 9월에는 지하에 스며들었던 약 50여명의 신자들이 하나 둘 서탑교회로 찾아 돌아오게 되었으며 헌당예배를 드리던 1993년 당시에 1,000여명의 교세로 급성장하기에 이르러 2005년 현재는 심양을 비롯 료령성안에 13개 교회가 개척되었으며 1,400여명의 교세로 성장하였다.

환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버리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필자는 지난 7월 1일 서탑교회 부목사인 오 목사의 미래의 서탑교회 비전에 대한 브리핑을 들으며 '오 주여 감사하나이다. 서탑교회가 중국선교의 전초기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란 기도를 하면서 귀국길에 올랐다.

박정규 박사(대신대학교 한국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