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뛰어! 뛰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뛰어! 결승점이 바로 저기야!” 결승점을 앞두고 있는 장거리 선수들에게 흔히들 말하는 외침이다. 아니면, 운동회에서 달리기 시합에 나서서 달리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외치는 소리일 수도 있다. 마지막 결승점에 이르기 위해, 그 한 순간을 위해, 선수들 각자는 수많은 세월을 연습하고 또 연마한다.


남들처럼 자지도 못하고, 남들처럼 입지도 못하고, 남들처럼 즐기지도 못하고, 남들처럼 행하지도 못하고, 남들처럼 먹지도 못하고, 남들처럼 마시지도 못하고, 그리고 남들처럼 울지도 못하면서 연습을 한 장거리 선수는 마지막 한 순간의 영광을 위해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한 순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이르렀다는 성취감이야말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한 성취감을 맛본 사람들은 다른 일에서도, 다른 분야에서도 그러한 노력과 끈기를 발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어떤 때는 초인간적인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장거리를 즐기는 사람들은 고독을 견디는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숨이 가파오고, 다음에는 근육통이 찾아오고, 나중에는 갈증이 나고, 결국에는 더 이상 뛰지 못하는 경우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을 극복하면서 달리는 당사자들은 자신과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한다. 외로운 투쟁이기에 달리는 자들은 여러 생각을 하면서 뛴다. 지나온 과거, 즐거웠던 일, 흥미로웠던 게임, 놀라웠던 여행 등을 생각하면서 뛰어야만 뛰는데서 오는 외로움과 고통을 이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음악을 들으면서 뛰는 분들이 있다. 외로움을 이기기 위함이다. 그리고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온다.

장거리의 깊은 의미는 운동을 통해 건강을 지키기 위함도 있겠지만, 자신을 극복하는데 그 강조점이 있으리라 믿어진다. 더 이상 뛰지 못하는 경우에까지 이르면서도 달리는 자신과 싸운다. 견딜 수 없는 순간까지 달린다. 이런 외로움과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반환점을 돌아 결승점이 있기 때문이다.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면 정말 허무하다. 아니 장거리의 의미는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되돌아올 집이 있다는 것만큼 인생에 큰 위로는 없을 것이다. 새벽같이 나가 노동하여 별과 달을 바라보며 집으로 오지만, 가정에 가족이 있다는 것이 하루의 고통을 모두 말끔히 씻게 될 것이다. 재롱을 떠드는 자녀들을 보노라면, 금세 고통을 잊어버린다. 새근하게 잠자는 모습을 보노라면 다시 일어서야하는 용기가 샘솟는다. 되돌아가야하는 집이 있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되돌아오는 길은 반환점을 돌 때까지의 길보다 훨씬 쉽게 느껴진다. 한번 지났던 길이기에 길의 사정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40대이면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다고들 한다. 그래서 인생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꿈 많은 10대를 지냈다. 활력 넘치는 20대를 겪었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는 30대도 지냈다. 이제 이러한 것을 바탕 하여 40대를 접어든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감당할 수 있는 인생의 시기이다. 하지만 되돌아가야하는 곳이 가까워 온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언제까지 나갈 수 없다. 무엇이든지 하고픈 마음이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되돌아가야하는 때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수도 적다.

반환점을 돈 인생인 동시에 인생을 살펴볼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정리하면서 나갈 줄 아는 시기일 것이다.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20-30대가 아니라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가족을 위해, 사회를 위해, 자신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가족이 나를 지켜보고, 사회가 나를 지켜보고, 교회가 나를 지켜보고, 그리고 자신이 나를 지켜본다.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 실망이 가중되어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불행스럽게도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마음이 너무 넘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들이다. 예외가 없다. 누구든 하늘나라를 향하여 경주하는 자들이다. 주님은 기도할 때마다 힘과 위로를 주신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꿈을 주신다. 찬양을 할 때마다 소망을 주신다. 그분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시다는 것이다. 7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도록 우리를 권면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떠나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늘 함께 있으시면서 결코 떠나지 않고 동행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만날 것이다. 그분에게 우리의 과정을 아뢸 것이다. 우리를 아시는 분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고할 것이다.

아담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물으시는 안쓰러워하시는 말씀을 듣지 말아야겠다. 우리를 후회하시도록 그분에게 슬픔을 안겨다 드리지 말아야겠다. 사탄들에게 욥을 자랑하시던 주님, 오늘도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시는 분,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영원토록 하시는 분,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을 실망시켜 드리지 말자.

라은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