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 바벨론 제국의 그 강한 기세가 꺾이고 새로운 제국인 페르샤 제국이 일어나던 시대, 70년 세월이라는 바벨론 포로기의 그 오랜 고난의 시대가 끝나려는 무렵에, 끊어졌던 예언자의 전통을 "새로운 소리"로 이어갔던 한 예언자가 거기 있었다. 비록 그의 이름은 익명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의 말씀이 기원전 8세기 앗수르 제국 시대의 예언자인 이사야의 글(사 1-39장) 바로 뒤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흔히들 그를 가리켜 "제 2이사야"(사 40-55장)라고 부른다. 무엇보다 그의 예언은 "새로운" 것이었다. 구약성서의 예언세계에서는 전혀 새로운 성격의 메시지로서 그 "이전의 것"과는 그 기본 내용에 있어서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1) 옛것과 새것: 그의 예언의 논조는 그 이전의 선배 예언자들(포로 전기[前期] 예언자들)과는 근본적인 전환(轉換)을 이루었다. 즉 그의 예언에서는 "죄에 대한 경고나 심판의 언어"가 완전히 사라졌던 것이다. 그의 예언의 제 일성(第一聲)은 단지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사 40:1,2)라는 사죄 선언과 죄값을 치룬 자에 대한 위로의 선포로만 구성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것은 옛것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서 물론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예컨대 애굽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해방 사건(출애굽 사건)도 그에게는 옛것이었고 고통스러웠던 70년 포로기의 고통도 그에게는 이젠 옛것이었으며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옛 시내산 계약사건도 또한 옛것이었다. 즉 바벨론 제국의 몰락과 페르샤 제국의 새로운 등장은 과거의 모든 신앙적 유산에 대한 새로운 반성을 불가피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새로운 것은 그의 예언의 논지가 <심판 메시지>로부터 <구원과 위로의 메시지>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점에 있었다. 즉 죄에 대한 예언자적 탄핵과 심판언어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이 현저한 변화요 새 모습이었던 것이다.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사 42:9)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 43: 18,19)라고 그는 외쳤던 것이다. 말하자면, 포로기 이전의 모든(!) 심판 논조는 사라졌던 것이다.

이토록 철저한 전환(轉換)은 제 2이사야 이후의 모든 포로기 예언자들에게서 조차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 예언역사의 흐름을 엘리야로부터 아모스를 거쳐 바벨론 포로기의 예레미야와 에스겔에로 이르는 그 예언사가 포로 후기 모든 예언역사를 모두 생락한 채 제2이사야 만을 거쳐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로 넘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 만큼 제 2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지"는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죄(罪)에 대한 경고나 질책 그리고 심판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위로와 회복의 새 창조(創造) 만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바벨론 포로 70년의 고통의 역사는 모든 옛 것을 모두 태워 소멸시키고 모든 것을 새롭게 출발시키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문책을 하거나 더 이상 죄를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은 징계를 받을만큼 다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오직 재창조(再創造)와 재조형(再造形) 만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2) 제 2이사야 예언자의 신학은 이렇게 하여 야훼 하나님의 고난을 통한 새로운 역사섭리를 통하여 놀라운 예언자적 깨달음과 신학적 각성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시는 분이심(사 45: 7)을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 고레스 왕도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자신의 종으로 삼으신다는 사실도 깨달았던 것이다. 이러한 각성을 통하여 그가 창출해 낸 새로운 신학을 우리는 다음 두가지로 요약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가)그 첫째는 <유일신(唯一神) 신학>이고 (나)그 둘째는 대속적 고난(고난의 종)을 통한 구속(救贖)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빛 뿐만 아니라 어둠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평안 뿐만 아니라 환난도 하나님께서 친히창조하신다는 사실, 이 모든(!) 일을 야훼 하나님께서 홀로(!) 하신다는 인식을 통하여 제 2이사야는 마침내 이원론적(二元論的) 신앙을 극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빛과 어둠,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이 둘은 결코 두 기원(起源)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기원을 갖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바벨론 포로기라는 특별한 고난경험이 가져다 준 것이었다. 말하자면, 어둠도 악도 불행도 죽음도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그 무슨 마귀가 하는 일은 결코 아니다는 각성, 이러한 각성이 마침내 그로 하여금 유일신론(唯一神論) 신학(神學)을 확립하게 하였던 것이다.

먼 후일, 의인 욥도 이러한 유일신론적 신앙을 통하여 그에게 닥친 이루 형언키 어려운 고난을 능히 극복할 수 있었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었다: "주신 이도 야훼시오 거두신 이도 야훼이시니 야훼의 이름 만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禍)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 2:10)라고 욥은 신앙적 승리를 구가(謳歌)하였다.

제 2이사야의 신학의 위대함은 그 무엇보다 "고난"의 대속적(代贖的) 기능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특히 의로운 자의 고난이 "대속적"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는 증언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救贖) 의지가 가장 확실하게 계시(啓示)된 곳이 바로 이 의로운 자의 대속적 고난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제 2이사야의 저 유명한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들은 바로 이 진리를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으며, 이 고난받는 야훼의 종 이미지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다고 하겠다.

분명, 구약과 신약의 연결이 가장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대목도 바로 이 부분이라고 하겠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을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 4-6)

"고난" 경험을 통한 하나님의 유일신성을 깨닫고 고난을 통하여 그 고난의 "대속적(代贖的) 속량성(贖良性)"을 깨닫는다는 것은 놀라운 신학적 각성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고난"은 흔히들 죄악의 결과 또는 악마의 활동의 부산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난"은 새로운 생명창조의 관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난"은 하나님의 인생교육/인생채찍의 주요한 교육도구였다. 제 2이사야 예언자에게 있어서도 이 "고난"은 하나님의 유일신성을 깨닫게해 주는 유일한 교육매개였다. 동시에 이스라엘 구원의 유일한 가능성도 이 이스라엘의 수난(受難)을 통하여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였다. 70년 바벨론 포로기의 수난은,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가장 바른 인식에 도달하게 해 주는 "매체"(媒體)였던 것이다: "아,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여! 진실로 주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25).

김이곤 교수(한신대 구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