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와 동시대의 북왕국 이스라엘 땅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을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증언하면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한 예언자가 있었다. 그를 가리켜 우리는 "호세아"라고 부른다. "호세아"라는 이름의 의미가 "구원하는 자"라는 의미(사역형 동사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 이미 암시하고 있듯이 그는 이스라엘의 회개와 구원에 대하여 남달리 심각한 생각을 하였던 예언자였다.


무엇보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아픔"을 절실하게 감지(感知)한 예언자였다. 사랑의 하나님 야훼께서는 열국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민족인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그러므로 그를 "아내"(metaphoric language)로 선택(選擇)하여 선민(選民)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선민(選民) 이스라엘은 이 야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남자들"인 바알들을 사랑하였다.

이스라엘의 "바알들"은 "떡, 물, 양털, 삼, 기름, 그리고 기름"들이었다(호 2:5). 이스라엘은 이들을 사랑하였고 이들을 "주"(바알)로 삼았던 것이다. 이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처럼 신앙하는 것을 우리는 "바알주의" 또는 "가나안주의"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어느새 이스라엘의 마음은 야훼주의로부터 바알주의 또는 가나안주의 이념을 추종하는 쪽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가나안 땅에는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호 4:2)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이 극(極)에 달하였던 것이다. 즉 "백성과 제사장이 동일"(호 4:9)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배신(背信) 때문에 중단될 수는 없었다. 야훼의 사랑은 이스라엘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던 것이다. 호세아의 하나님 체험은 바로 이 점에 있었다. 야훼 하나님은 사랑이셨고 그 사랑은 이스라엘의 부정절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신실하신" 사랑이셨다는 것이 호세아가 체험한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이엇다. 즉 그는 계약(契約)에 절대 신실(信實)하신 분이셨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셨다.

이러한 하나님 체험은 예언자 호세아의 불행스러운 결혼 경험을 통하여 어렴풋 하게나마 감지(感知)되었던 것이다. 호세아는 음난하고 부정절한 아내를 사랑하고 그를 아내로 맞았었다. 그리고는 그 아내를 그의 신의를 다 기울여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자신의 신실한 사랑을 외면하고 물질의 풍요와 향락의 즐거움을 약속해 주는 정부(情夫)의 품을 더 사랑하여 그를 따라갔던 것이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 부정절한 아내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픔을 통하여 희미하게나마 감지된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부정절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아픔"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언자 호세아는 어디에서부터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던가? 예언자 호세아는 이 깨달음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고난교육"의 진의(眞意)를 감지(感知)하면서부터 얻을 수 있었다. 이 사실은 호세아 2: 6-7과 호세아 2:14-15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본문은 모두 "그러므로"라는 특별한 강조적 수사어투로 시작한다. 즉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배신"하므로"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포기할 수 없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특단의 조치를 취하셨다는 것이고 그 특단의 조치가 바로 <고난교육(苦難敎育)>이라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호세아가 전한 바에 의하면, 야훼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가지 못하게 하리니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호 2:6-7).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녀]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녀]의 포도원을 그[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 2:14-15).

이러한 말씀들을 통하여 호세아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야훼 하나님은 음난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배신의 길을 가시와 담으로 막으셔서 그 배신의 길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깨닫도록 고난의 가시와 절망의 담으로 훈련시켜 주신다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 부정절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의 참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15장)의 "탕자의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

이러한 의미의 예언자적 증언은 좀 더 역사적인 언어로 다시 표현된다. 즉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애굽의 종살이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지만 이 이스라엘을 훈련시키시려고 하나님은 아골 골짜기"와 같은 <고난의 광야>로 이스라엘을 유인해 내시고 거기서 이스라엘을 훈련시키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도록 하셨다고 말한다.

배신자는 응징하거나 버리거나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배신자로 하여금 그 배신의 길이 잘못이라는 것을 고난의 채찍으로 가르쳐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며 이 마음이 곧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호세아가 본 바,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사랑하여 선택한 자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 선택하신 자가 비록 그 사랑을 배신하고 죄의 길로 들어선다고 하더라도 그를 단념하거나 내어 버리시는 일은 없으시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를 회유하여 그로 하여금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예언자 호세아는 처음에는 부정절한 아내조차도 감싸시는 "남편"으로 은유(隱喩)하였으나, 나중에는 불순종의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아들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교육시켜 돌아오게 하시는 "어버이"로 은유(隱喩)하기까지 하였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신약의 예수님의 가르침에 가장 근접한 가르침을 남겨 놓은 구약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이 "호세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십자가를 선택하시리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기어이 구원해 내시려는 의지를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듯이 호세아도 그 옛날 이미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는 결코 분노와 심판, 그리고 전쟁과 복수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이 호세아가 증언한 하나님이다.

김이곤(한신대 신학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