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하던 이스라엘이 가나안 경작지에 정착한 이후부터는 그들의 삶의 패턴은 바꾸어져야 했다. 그들이 결정적으로 부딪힌 것은 가나안의 사회구조였다. 이스라엘이 갖고 있었던 사회체제는 느슨하게 연결된 지파연합체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가나안 땅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그것이 소(小) 도시형 왕국이든 민족 단위의 왕국이든 간에, 부족연맹체와는 아주 다른 "왕권체제"(monarchism)를 갖추고 있었다. 즉 가나안 정착 초기의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왕권체제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정착 초기의 이스라엘은, 소위, 사사(士師: charismatic leaders)들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이 사사(士師)들은 두 가지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자신이 속한 지파를 침락자들의 손에서 지켜 간 전쟁영웅(divine warrior)의 기능을 하는 것이었고 그 둘째는 이스라엘의 행정적, 사법적 통치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과도기(일종의 무정부 상태)를 지켜간 사사(士師)들의 시대가 점차적으로 그 한계를 심각하게 의식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나타나서 이스라엘의 전 운명(the whole weight of Israel's problems)을 짊어지고 이스라엘 사사들보다 위에 있었던 인물로서 이스라엘의 새 시대, 즉 왕조 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자였다.

그러나, 신명기적 역사가가 매우 적절히 그리고 매우 주관적으로 서술한 바대로, 사무엘은 왕조 수립이 갖는 두가지의 상반된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던 인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 상충되는 문제를 소화해 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준 "민족의 스승"이었다. 즉 그 첫번째 문제점은 왕조수립이란 역사의 필연(historical necessity)이라는 사실이고 그 둘째 문제점은 왕조 이념이란 신정(神政: theocracy) 과는 그 신앙구조에 있어서 매우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사무엘은 이 두가지의 문제점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적절히 소화하고 이해하게 하여 무정부적(無政府的) 사사(士師)시대를 신정이념에 기초한 왕조시대로 전환하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의 진정한 정체성(identity)을 수립하여 새로운 이스라엘 건국을 이룩하였던 민족 지도자였다.

사사시대 말(末), 이스라엘에게는 왕조수립은 하나의 "역사적 필연"이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서자 마자 가나안 왕, 불레셋 왕, 모압 왕, 암몬 왕 등등의 제국주의자들의 집요한 공격과 억압 속에서 시달려야 하였다. 이 위협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마침내 민족 공동체를 살리는 적절한 자구행위(自救行爲)로서 "왕조"(monarchy)체제를 창조해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왕조체제는 결정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왕조체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법(토라)질서를 결코 바르게 지켜 가기 어려운 체제였기 때문이다. 즉 이 체제의 모형인 이방나라의 왕조체제를 보면, 그것은 "왕"이 국가의 모든 것의 주인이 되고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토지나 물건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왕"의 소유가 되어 왕의 노예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삼상 8장) 이스라엘의 신정(神政) 이념이 이러한 체제와 이념을 수용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신정이념의 출발정신은 이러한 왕정체제의 제국주의적 이념과는 달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법 앞에서 평등(平等)하고 그 어떤 인간도 인간이 인간의 노예가 되는 것은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이러한 왕정체제의 필연적인 요구 앞에서도 이러한 신정이념과 왕정이념의 불타협의 충돌을 예리하게 예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왕의 기능, 사제의 기능, 그리고 예언자의 기능 모두를 모두 섭렵한 "하나님의 사람"(이쉬. 하엘로힘)으로서 사무엘은 비록 에브라임 지파의 사람이면서도 철저하게 지파를 초월하여 벧엘, 길갈, 미스바, 라마 등지를 순회(巡廻)하면서 <신정(神政) 이념 위에 왕조체제를 수립하는 일>의 기초를 놓아 갔던 것이다(삼상 7:16-17). 이것은 "사울"을 기름부어 세웠다가 곧 그를 폐기하고 그 대신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어 세우는 그 이중구도 속에서 잘 읽을 수 있다(삼상 15:34-16:13).

"사울"은 신정(神政) 이념의 전통에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새 체제인 왕정(王政) 체제를 제대로 구축해 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강력한 왕정(王政) 체제를 수립하면서도 그 기반은 신정(神政) 이념의 터 위에 확고히 세워 놓았다(삼하 7장 참조). 이것은 전적으로 사무엘의 신앙전통과 계몽운동(啓蒙運動)의 한 결실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사무엘은 실로 "제2의 모세"였다.

"법궤 설화"(삼상 6:1-7:2)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사무엘은 야훼의 궤(櫃)인 "법궤"(法櫃)를 국가의 중심점에 놓고 나라를 다스렸고, 따라서, 사무엘이 "토라"에 의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은 이스라엘은 불레셋의 위협으로부터 전적으로 안전하였다는 것이다(삼상 7:13). 이러한 전통을 다윗이 계승할 때도 또한 그가 법궤를 자기 성(城)으로 옮겨 옴으로서 그러한 전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법궤 전통"은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물려 준 유일무이한 최대의 신앙 유산인데, 사무엘은 바로 이 법궤를 기브아 산지 아비나답의 집에 안치한 후, 금식하고 참회하며 "부르짖음"으로 "토라"(Torah)를 성실히 추구하는 정치를 하였다. "에벤에셀"(구원의 돌) 성지(聖地) 구축과 이에 따른 이스라엘 평화구축은 이러한 그의 신앙전통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삼상 7장 참조). 바로 이 전통이 "나단"의 신탁(神託: oracle)을 통하여 "다윗"에게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사무엘은 모세 이래 이스라엘 제2 건국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사(史)에 우뚝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사제(司祭) 전통의 본류(本流)가 무엇인지를 새 시대를 위하여 가르친 사제전통(司祭傳統)의 아버지였다. "부르짖음"과 그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을 기초로 한 "제단"(祭壇)을 쌓고 그 제단종교를 통하여 민족의 평화를 구축하였던 지도자였다.

그는 또한 예언전통(預言傳統)의 원류(源流)가 무엇인지도 새 시대를 향하여 가르친 이스라엘 예언전통의 아버지였다. 그는 해마다 벧엘, 길갈, 미스바, 라마 등지를 순회(巡廻)하면서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오직 야훼만을 섬기는 길(삼상 7:4)과 참 평화(平和)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토라"(Torah)를 중심하여 가르친(삼상 7:13-14) 이스라엘의 스승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왕정이념(王政理念)이 무엇인지를 신정이념(神政理念)의 방향에 따라 가르침으로써 다윗 왕조의 진정한 기틀을 놓은 이스라엘의 <신정적(神政的) 왕정전통(王政傳統)>을 창립한 이스라엘 최대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야훼의 말씀이 희귀하여 비젼(vision)이 사라졌던"(삼상 3:1) 그 역사적 위기를 극복하게 하고 신정적 왕정 전통을 이스라엘 땅에 수립해 놓는 일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김이곤 교수(한신대 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