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이야기(창 37, 39-47, 50)는 구약의 "지혜자 학파(wisdom school/wisdom circle)"가 남겨 놓은 대표적인 "교훈문학(敎訓文學)"들 중의 하나로서 "역사의 하나님"(historical God)을 가장 설득력있게 그리고 가장 극적으로 그려 놓은 경전문학적 작품이다. 그 작품 속에 담겨 있는 신학적 이슈는 신구약 성서 세계가 제기한 그 어떠한 신학적 논의보다 진지하다.


2001년 7월 16일자 타임(Time)지 종교란은 "욥의 인내: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가리우실 때!"라는 제하(題下)에서 "하나님은 의(義)로우신가?" "하나님은 선(善)하신가?" "고난은 불의이며 신의 징벌인가?"라고 하는 신학적 난제를 사회고발적인 언어로 공개토의에 붙인 바가 있었다.

그리고, 1998년의 출판물인 매우 학구적인 구약학 논문집, 『월터 브루그만에게 드리는 헌정(獻呈) 논문집: 시끄러운 논쟁 속의 하나님』이라는 제하의 신학 서적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저 "이해(포착)하기 어려운 하나님"(elusive Presence cf. S. Terrien의 신학 학술용어)을 감히 현대인의 고뇌 속으로 몰아 넣어 심각한 신학적 쟁의의 중심 주제로 삼은 바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그 불가해성(不可解性)에 관한 문제들 중에서도, 특히(1),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가리우실 때"(When God hides His face) 우리 세계에 드리우는 참담하고도 어두운 인간고(人間苦)의 역사에 대한 문제(Deus absconditus)가 그 무엇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셉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신학적 문제, 즉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가리우실 때에 생기는 불가해(不可解)한 인간고(人間苦)의 문제와 참혹하리 만큼 부조리(不條理)한 인간 역사의 문제를 과연 우리 인간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특수한 문학적 필법으로 잘 설명해 준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며 비젼을 꿈꾸던 진실한 사람인 "요셉"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단지 "꿈꾸는 자"(빠알 하할로못; 창 37:19 cf. 욜 2: 28[3:1])라는 결코 이유일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형제의 손에 의하여 미디안 상인에게 인신매매(人身賣買)되어 애굽으로 팔아 넘겨진다. 형제가 형제를 인신매매하는 최악(最惡)의 비극과 불운 속에서 요셉은 해결 불가능의 납득할 수 없는 시끄러운 하나님 논쟁에 휘말려 든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유일한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의로운 꿈의 소년, 17세 어린 나이(창 37: 2)의 요셉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무자비한 고통 속에 속수무책 빠져드는 것인가? 이 참혹하도록 억울한 요셉의 비운이 어떻게 그렇게도 쉽게, "악한 짐승에게 잡아 먹힌 것"(창 37:33)으로 위장되어 20여년 간이나(창 41:46, 53) "하나님의 침묵"(하나님의 부재: 데우스 압스콘디투스)속에 묻혀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자신을 숨기시는 부재(不在)하시는 이 불가해의 하나님(사 45:15)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이 "침묵" 못지 않게 요셉의 "침묵"도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형들로부터 그 입은 채색옷을 강제로 벗기우고 물없는 웅덩이에 던지워 졌을 때도(창 37:23-24), 그리고 단돈 은(銀) 20에 팔려 갔을 때도(창 37:28 cf. 레 27: 5; 5세에서 20세까지의 남자 몸값) 요셉의 침묵은 계속되었고 요셉이 애굽 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성 희롱자"(창 39:14)로 억울한 적반하장(賊反荷杖)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도 그의 침묵은 계속되었으며 더욱이 그 억울한 감옥살이 속에서도 같은 감방의 죄수들을 위하여 꿈해몽까지를 해 주는 여유로움을 보여 주었는데, 좋은 꿈 해몽을 듣고 출옥하여 옛 관직을 회복하였던 그 관원이 출옥한 후 만 2년(창 41:1)이나 되도록 요셉의 은혜를 기억지 못하고 잊고 있었을 때도 요셉의 "침묵"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요셉 이야기를 창출한 구약 지혜문학권에서는 이 "침묵"을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대한 신정론적(神正論的) 신앙의 가장 확실한 표현이라고 이해한다. 즉 하나님은 역사섭리의 신(神)이시라는 것이고 역사의 신이 섭리하시는 그 역사의 종국은 "구원"이며 하나님의 의(義)는 필연적으로(사필귀정적[事必歸正的]으로) 승리한다는 것이다. 요셉은 이 신앙을 증언한 대표적인 지혜 신학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요셉의 신앙은 "도마 위의 생선"(cf. 창 45:3)같이 그 생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된 형들 앞에서 그가 증언한 다음과 같은 언어들 속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하여 근심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구하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창 45:4-5).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십니다(창 45:8).

"하나님은 의(義)로우신가?"(Time 지, 2001. 7. 16) 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善)하였는가?"(James Barr, God in the Fray, Pp. 55-65)라는 매우 시끄럽고 난해(難解)한 신학적 물음에 대한 요셉 이야기 기자가 던진 대답이 바로 이러한 요셉의 언어 속에 뚜렷이 나타나 있음을 볼 때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놀랍다! 형들이 "생으로 인신매매"한 그 악(惡; 창 50: 15,17)을 감히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잠시 자신의 얼굴을 가리우셨을 때 생긴 인간고(人間苦)에 불과한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라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義)로우시고 선(善)하신 분이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神) 인식(認識)에는 반드시 고통스러운 신정적론(神正論的)인 인내(忍耐)의 신앙이 요청된다는 것이 성서의 중심적 증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善)하였는가?"(James Barr)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렇게 하여, 그렇게 낙관적으로만 대답할 수는 없는 신학적 쟁점(爭點)으로 남게 되었다. 즉 하나님은 생명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빛 상만 얏댐라 어딘도, 說얕 瑥난[고난]도 瑟所吳썬닳 븟>(사 45:7)이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으신 것>(시 137: 12)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은 불의(不義)도 악(惡)도 하나님의 징벌(懲罰)도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요셉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창 50:20)이 하나님이시오, 그러므로 그는 "역사(歷史)의 신" 즉 구원사(救援史)의 신"이시라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그의 그 믿음이 그의 아버지 야곱(이스라엘)의 가문을 죽음같은 가나안 땅의 흉년으로부터 능히 살려내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구약성서 해석가들은 여기서 요셉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type)이요 예표(豫表: prefiguration)라는 <요셉-그리스도> 유형론(類型論; typology)을 발견하기까지 한다.

김이곤 교수(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