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은 대한민국 비극의 날이다. 21세기 들어 국내에서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약 300명의 영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 후 많은 설교자가 세상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역할에 대해 재고했다.

이처럼 사건은 신앙과 사역에 영향을 준다. 한국에 세월호 사건이 있었다면, 미국에는 9·11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구약학자인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mann)은 본서 「Reality, Grief, Hope(현실, 절망, 그리고 소망)」를 통해 이러한 대재앙과 마주한 설교자를 고대 이스라엘로 끌고 가서, ‘무엇을 어떻게 선포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 준다.

고대 이스라엘에도 역사적 비극이자 큰 충격이었던 민족적 아픔의 기억이 있다. 바로 B.C. 586년의 예루살렘 멸망이다. 월터 브루그만은 이 시기를 전후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선민 사상 이데올로기, 둘째로 왕국 실패에 대한 부정, 셋째로 실제로 겪은 멸망으로 인한 절망.

고대 이스라엘을 사로잡았던 선민 사상 이데올로기는, 역사 속에서 왜곡된 이스라엘의 기억으로 인한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예루살렘 멸망 이전 두 개의 큰 사건과 약속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 언약과 출애굽 이후 모세 언약이다. 본래 그 언약들은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으나, 솔로몬 시대에 와서, 즉 예루살렘 설립 이후 자신들의 민족과 국가를 위한 것으로 오용되었다. 다시 말해 선민 사상 이데올로기가 형성된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을 속인다.

특히 부르그만에 따르면, 이 이데올로기는 정치·경제적 죄악과 종교적 죄악을 저지르게 만든다. 정치·경제적 죄악은 도시 엘리트들을 위해 소작농을 이용하는 것이며, 종교적 죄악은 여호와를 자신들에게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이 분석은 미국에도 적용된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고대 이스라엘이 가졌던 그 선민 사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별히 오늘날의 미국 예외주의(exceptionalism)라는 오만함과 인종차별적 그 성격이 이를 반증한다. 구체적 증거로는 군사 확장 정책, 소수 엘리트들에 의해 좌우되는 독재에 가까운 과두정치, 앞서 설명한 참 미국인과 유입된 미국인을 구별하는 인종차별, 천연자원 전유, 시장 독점, 값싼 노동력 제공을 통한 경제 통제 등이 있다.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미국인의 선민 사상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민 사상 이데올로기 앞에서 선지자들은 어떻게 했는가? 현실을 깨우쳐 주어야 했다. 이데올로기는 결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 왔다. 의, 공의, 인애 등을 상실한 것, 하나님을 축소시키고 이웃을 돌보지 않는(특히 복지 혹은 공익 추구의 포기) 이러한 정책은, 어떤 핑계에도 결국 예루살렘 멸망과 같은 비극을 가져올 것임을 알리는 일이 선지자의 목소리이다.

한편 아직 비극이 찾아오지 않았지만 비극을 미리 내다본 선지자들의 주장은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실제로 왕과 성전 주위에 있던 도시 엘리트들은 오히려 성공적인 미래만을 상상했다. 선민 사상 이데올로기 혹은 예외주의에 사로잡혀 현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특히 무의식적으로, 실제 그들이 지닌 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자격 혹은 특권의식이, 도시 엘리트들로 하여금 더욱 멸망에 대해 부정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신앙은 현실을 부정한 채 오로지 ‘샬롬, 샬롬’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따라서 도시 엘리트들에게 현실 부정이라는 망상에서 깨어나게 해줄 해독제를 제공하는 것도 선지자의 역할이다. 바로 비탄의 소리를 내는 것이다.

선지자들의 탄식이야말로 바로 이런 해독제의 전형이다. 단순히 신세 한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며 이데올로기가 감추어 놓은 진실에 눈을 뜨게 해 주기 위한 것이 선지자들의 수사학과 퍼포먼스였다. 예레미야애가와 같은 탄식시는 최고의 수사학이다.

고대 이스라엘 도시 엘리트들처럼, 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눈을 닫으려 한다. 단적인 예로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미국은 오로지 미국의 위대함만을 방영했고, 거기에 방해가 되는 장면들은 선택적으로 내보내지 않았다(특히 NBC방송국은 영국을 치켜세우는 오프닝 세리머니 장면 6분을 생략했다). 존 윈스롭의 ‘언덕 위의 도시’는 결국 미국 예외주의에 찬성하는 백인 앵글로 색슨 개신교인들의 무기가 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전쟁들(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 군사력의 한계를 보여주었고, 미국의 경제력 또한 중국의 성장으로 점점 제한되고 있으며, 유럽의 도움 없이는 무력한 것이 현실이다. 국내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미 모든 종류의 사회적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의료, 교육, 일자리, 주거 등 모든 문제에 있어 위험하기만 할 뿐, 정의와 이웃 사랑은 없다.

특히 9·11 사건은 미국 역사 속에서 고대 이스라엘 멸망 사건에 준하는 전환적 사건이다. 9·11 사건을 겪고 나서도 미국이 전과 같은 정책과 방식으로 정상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다.

월터 브루그만은 이미 미국의 군사적 헤게모니, 즉 세계에 대한 경제적 주도권은 끝났고, 인종 단일성의 추구나 독단적 윤리관의 시대도 지나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민 사상 혹은 예외주의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을 사로잡아, 동일한 방식으로 미국이 회복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든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현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 이데올로기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드러내야 한다. 상실·실패를 인지시키는 것이야말로 선지자의 또 다른 직무이다.

그렇다면, 선지자들은 현실을 깨닫게 해 주고, 다가올 절망만 말하는 자인가? 그렇지 않다. 실제 예루살렘 멸망이 찾아왔을 때, 모두 절망을 경험했다. 이스라엘 민족의 사고에 대전환이 찾아온 것이다. 그들의 선민 사상 혹은 예외주의 이데올로기는 깨어졌고, 다음 왕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성전도 텅 비었다. 솔로몬의 ‘영원히, 무궁히’의 기원이 깨진 것이다.

정치·경제가 무너졌을 뿐 아니라, 이제 신학적으로도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신정론에 대해 재고해야 했다. 특히 새로운 세대는 선민 사상이나 여호와의 선택을 실제 경험하지도 못할 것이었다. 불평과 불만, 신앙에 대한 회의가 절망 가운데 만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시기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윌리엄 제임스 같은 학자들은 종교를 버리는 이들을 건강한 영혼, 종교에 매달리는 이들을 약한 영혼이라 칭한다. 그러나 리처드 벡은 정반대로 그 단어를 사용하며, 오히려 종교적 망상에 매달리지 않으면서도 깨어진 세상이라는 현실과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 사이에서 고민하는 약한 영혼이야말로 추구해야 할 자세라고 말한다.

그처럼 절망 가운데, 거짓 종교에 매달리기만 하거나 혹은 그와 대조적으로 염세주의에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말하는 것이 선지자의 가장 중요한 남은 직무이다. 이 희망의 계시는 비록 옛 전승을 잇지만 단순히 과거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여호와의 ‘새로운’ 길이다(브루그만은 이처럼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깨닫고 있는 신학자로 칼 바르트를 내세운다).

그런데 미국은 아직까지 절망 직전에 있고, 9·11을 경험했음에도 완전히 무너진 것이 아니므로 옛 이데올로기를 지키려고 하면서 동시에 불안을 느낀다. 미국의 불안은 무절제한 개인의 탐욕, 복지 혹은 공공선의 몰락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주의, 폭력의 정당화(예를 들면 총기 합법화), 단순한 윤리 혹은 질서로 유지되었던 옛 세계에 대한 향수, 그럼에도 몰락에 대한 어렴풋한 감각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이처럼 그 절망을 어느 정도 인지하며 그 불안함을 느끼고 있지만, 그 탓을 옛 질서가 아닌 약자들에게 돌린다.

따라서 미국은 새로운 질서에 당연히 동등하게 편입되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이웃이지만, 아직까지는 주변부에 있으며 낯설며 약자의 입장에 놓인 이슬람교, 이민자들, 성소수자들을 공격한다. 미국은 기로에 서 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인가, 아니면 결국에는 파괴될 옛 방식을 고수할 것인가?

이때 누구라도 의문을 가질 것이다. 거짓 샬롬과 참 샬롬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월터 브루그만은 ‘새로움(newness)’이 그 기준이라 말한다. 하나님은 새롭게 시작하시는 분이다. 새로운 실제, 새로운 인간 공동체가 필요하다. 예레미야도 새로운 언약 공동체를 말했고, 이사야는 새로운 샬롬의 도시를 말했으며, 에스겔도 역시 새로운 성전을 말했다.

마냥 새롭기만 한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월터 브루그만은 이 새로운 세계에는 조건이 있다고 주장하며 한 장을 덧붙인다. 실제로 현재, 이 세계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정책을 펴고 있으며, 두 가지 대안을 놓고 있다. 제국적 전체화(totalizing narrative of the empire), 협력관계적 개별화(particularizing narrative of the neighbothood).

둘 다 스스로 복음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제국적 전체화는 필연적으로 최상위 계층에 과도한 부가 몰리는 피라미드식 경제, 소수 또는 서민들의 목소리를 배제시키는 정치적 단일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을 부정하는 일차원적 종교라는 문제를 가진다.

그에 비해 협력관계적 개별화는 현 시대의 약자부터 만족시키는 경제, 노예의 목소리가 파라오의 귀에 들리게 하는, 계층을 초월해 동등한 대화가 가능한 정치, 단일화된 제국 종교가 아닌 각 주체가 자신의 신앙을 갖고 상호 소통하게 하는 그러한 종교를 지향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미국 상황을 염두에 두었으며 미국의 설교자들을 향한 책이지만, 기독교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으나 다원주의적인 국내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특히 미국 교회와 신학을 누구보다도 많이 수입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책이다. 브루그만의 신학만 번역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정신을 우리는 번역하여 소유할 필요가 있다.

월터 브루그만은 결론을 내리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원치않는 위기로 걸어가고 있음과 그 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움으로 가고 있음도 의심하지 않는다. … 이러한 것에 대한 간결한 표현이 바로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사명에 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렘 1:10).’ 이러한 이중적 사역은 이데올로기가 깨어지고 공동체가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려고 할 때 가능하다.”

◈도서정보

Reality, Grief, Hope: Three Urgent Prophetic Tasks
저자 월터 브루그만은 조지아 디케이터에 위치한 컬럼비아신학교(Columbia Theological Seminary)의 구약학 명예교수이다. 다른 책으로는 <삶의 두려움(대한기독교서회)>, <구약신학(CLC)>, <예언자적 상상력(복있는사람)> 등이 있다.
가격: 15.00달러(국내 미번역)

/진규선 목사
총신대 신대원(M.Div.)를 졸업하고 서평가·편집자·번역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