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서원 연구원이자 다독가이신 정현욱 목사님(부산반석교회)이 2015년 두 번째 선택하신 ‘다시 읽는 고전’은 ‘천로역정’의 존 버니언이 쓴 또 다른 역작 ‘거룩한 전쟁’입니다.

 

거룩한 전쟁
존 버니언 | 생명의말씀사 | 392쪽 | 19,000원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없다. 맞는 말이다. 그래도 ‘만약’이란 가정은 역사를 바라보는 통찰력을 길러준다. “만약 <천로역정>이 없었다면 <거룩한 전쟁>은 가장 뛰어난 우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인 토마스 매콜리는 ‘거룩한 전쟁’을 그렇게 표현했다. 존 버니언의 <거룩한 전쟁>은 영적이나 문학적 측면에서 <천로역정>에 버금가는 탁월한 저작이다.

그러나 <천로역정>에 비해 <거룩한 전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존 버니언을 생애를 깊이 연구하는 몇 명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른다. 거룩한 전쟁은 숨겨진 보화이자, 더 알려져야 할 책이다.

<거룩한 전쟁>은 한국청교도연구소장 김홍만 목사의 충실한 조언처럼, 내면의 영적 경험을 그려주는 한 폭의 그림과 같다. 김홍만 목사는 <천로역정>과 <거룩한 전쟁>을 이렇게 비교한다.

“<거룩한 전쟁>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과 함께 또 하나의 걸작이다. <거룩한 전쟁>은 <천로역정>과 같이 풍유적으로 서술된 작품이지만, 이 둘의 스타일과 등장인물은 확연히 다르다. <천로역정>이 그리스도인들의 순례 길에서 외부적 환경에서 오는 영적 체험을 다루고 있는 반면, <거룩한 전쟁>은 영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체험들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홍만 목사의 서술에 동의한다. 그러나 <천로역정> 역시 내면적 갈등과 영적 체험이 동반된 우화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천로역정>과 <거룩한 전쟁>은 이처럼 많은 부문에서 닮아 있으면서, 또 완전히 다르다.

<천로역정>은 개인의 거듭남과 영적인 체험, 천상으로 향하는 순례의 길에서 일어나는 개인적 체험의 이야기다. 세상이라는 장망성에서 전도자에게 복음과 성경을 전해 받는다. 성경을 통해 자신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상이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을 알게 된 크리스천. 결국 친구들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귀를 막고 ‘영생 영생 영생’을 외치며 장망성을 빠져 나간다. 십자가에서 짐을 내려 놓음으로 순례의 길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천상까지 가는 노정(路程)에서 갖가지 유혹과 장애물을 만나지만, 결국 천상에 도착한다는 이야기다.

<천로역정>은 탁월한 영적 우화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아야 했다. 주인공이 가족을 책임지지 못하고 독단적 선택을 하는 무책임한 가장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을 의식한 탓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2부에서는 가족들이 아버지를 따라 영적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거룩한 전쟁>은 <천로역정> 1부가 출간되고 2부가 완성되어 가는 중간인 1682년 출간되었다. 저자는 개인화된 구원의 여정을 보편적 구원서사로 풀어내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거룩한 전쟁>은 ‘맨소울’이란 성에서 일어나는 영적 변화를 우화(寓話) 형식으로 풀어낸다. 맨소울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샤다이 왕’이 건축한 성이다. 구약에서 엘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뜻하는데, 존 버니언은 엘을 빼고 샤다이라는 명칭만을 사용했다. ‘샤다이’를 굳이 번역하자면 ‘전능자’ 또는 ‘통치자’가 될 것이다.

기쁨의 성이었던 맨소울에 어느 날 디아볼루스가 침략해 들어온다. 온갖 술수와 속임수로 성을 빼앗은 디아볼루스는 맨소울을 포악하게 다루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맨소울 주민들은 샤다이 왕에게 구원해 달라고 청원한다. 샤다이 왕은 자신이 직접 가지 않고 자신의 아들인 임마누엘 왕자를 장군들과 함께 보낸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으로, 말씀이 성육신한 예수님을 말한다. 치열한 접전 끝에 임마누엘 왕자는 맨소울성을 되찾고, 맨소울 주민들은 기쁨을 회복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맨소울 주민들은 디아볼루스의 수하인 ‘육적 안일 씨’의 농간에 넘어가 다시 임마누엘 왕자를 따돌린다.

‘육적 안일’은 첫사랑이 식어버린 에베소 교회와 같다. 예수를 영접하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성도는 기쁨과 소망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태와 게으름에 빠져,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외형적인 모습은 여전히 뜨겁고 활기에 넘치는 것 같지만, 내면 상태는 기쁨이 사라진 지 오래다. 예배의 감격도 없고, 구원의 기쁨을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있으며,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말라 버린 지 오래다.

이는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타성에 젖어 살아가는 오늘날 성도의 모습이 아닌가. 습관적으로 종교행사에는 참여하지만 진정한 예배는 드리지 못하는, 우리의 일상일 수 있다.

결국 임마누엘 왕자는 맨소울의 차가운 외면에 성을 떠나게 되고, 맨소울은 다시 디아볼루스의 반격을 받게 된다. 맨소울 주민들은 자신들의 비참함과 위급함을 깨닫고 긴급회의를 열어, 임마누엘 왕자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임마누엘 왕자는 거듭된 청원에도 불구하고 답을 주지 않는다. 절박한 심정으로 고통을 당하던 맨소울 주민들은 디아볼루스의 의심 군대를 상대하며 처절한 삶을 연명해 가면서도, 임마누엘 왕자에게 계속 도움을 요청한다.

이처럼 철저하게 낮아진 맨소울의 상태는 영적 나태와 거만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내면을 보여준다. 임마누엘 왕자는 거듭된 청원에 결국 다시 맨소울을 구원하기에 이른다.

이 작품은 창조, 타락, 구속, 나태, 고난, 회복이란 구원 서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천로역정>과 완전히 다른 영적 측면을 보여준다. <천로역정>이 개인의 구원과 천상을 향한 여정이라면, <거룩한 전쟁>은 성경의 전 연대기를 담은 신학적 이야기다. 조밀하게 짜인 플롯과 배경인물 설정은 존 버니언의 탁월한 영적 깊이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천로역정>으로 다 담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구원 서사를, 저자는 <거룩한 전쟁>을 통해 풀어냈다.

청교도였던 존 버니언은 말씀의 깊이에 문학적 기교를 더해, 당대의 청교도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한다. 일반 목회자들이 딱딱한 설교와 신학적 저술을 통해 영적 문제를 해석한 반면, 존 버니언은 소설이라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들려준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쳤고, 문학사적으로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다.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설교와 강해만으로 풀어낼 수 없었던 신학적 난제들을 소설을 통해 선명하게 그려 주었던 것이다. 김홍만 목사는 이렇게 언급한다.

“신자는 영적 황폐함과 그것에 대한 비참함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비참함과 그것에 대한 고통들을 철저히 경험하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다. 그래서 그 영혼에 죄를 미워하고 싸우는 성향을 보다 강력하게 만들려고 하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영혼을 낮추어 더욱 겸손하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거기서 떠나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삶은 영적 전쟁터다. 문제는 육신의 눈으로 전쟁을 치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영적 전쟁터에서 필요한 것은 영적인 눈이다. 존 버니언은 내면에서 일어난 영적 전쟁을 우화라는 매체를 통해 객관화시켜 바라보게 한다. 맨소울을 점령한 디아볼루스는 맨소울 주민들을 헛된 희망의 투구, 굳은 마음의 흉갑, 저주하는 혀, 불신앙의 방패, 침묵하고 기도하지 않는 마음으로 무장시킨다. 이러한 무장은 사탄이 점령한 인간의 내면이다.

▲정현욱 목사.

아담의 타락 이후 사람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하여 극도의 혐오감을 갖게 되는데, 버니언은 그것이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탄의 농락에 의한 것임을 일러준다. 샤다이 왕이 금지한 사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들이대며 ‘관용을 모르는 무자비한 법’으로 몰아가는 것도, 에덴 동산의 뱀을 그대로 닮았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내가 나를 가장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나를 잘 보지 못한다. 눈은 우리 안으로 향하지 않고 타인으로 보도록 창조되었다. 이것은 타인을 통해 나를 볼 수 있으며, 객관적 시각으로라야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존 버니언은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영적 내밀한 풍경을 우화를 통해 세밀하게 보여준다. 영적 현미경과 같은 존 버니언의 <거룩한 전쟁>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고자 몸부림치는 성도에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