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의 인식론과 살림의 신학>.

모름의 인식론과 살림의 신학

박재순 | 홍성사 | 416쪽 | 13,000원

‘우리의 신학’은 ‘우리’를 너무 강조하면 ‘다른 복음’이 되기 쉽고, ‘신학’에 방점을 찍으면 ‘다를 게 없는 복음’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름의 인식론과 살림의 신학>은 ‘우리의 신학’에 있어 균형감과 깊이를 갖추고 있다. 일례로 유불선, 동학의 인내천 등 한국인의 심성과 삶 속에 깊이 새겨진, 온갖 ‘셋과 하나의 묘합(妙合)’을 말하는 ‘삼일(三一)사상’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여기서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

다 아는 단어이지만 합쳐서 보니 이해가 쉽지 않은, 선뜻 책을 집어들지 못하게 만드는 책의 ‘제목’에 그 열쇠가 있다. ‘모름의 인식론’이란 ‘반드시, 꼭’을 뜻하는 우리말 ‘모름지기’에서 나왔는데, 다석 유영모는 이를 ‘모름직이(모름을 지킴)’로 풀었다. 생명과 물질의 세계에는 이성이나 물질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즉 밖에서는 규명할 수 없는 ‘모름’의 차원이 남는데, 이를 이성이나 개념으로 훼손하지 않아야 생명과 물질의 성격을 밝힐 수 있다.

“모름을 지킬 때,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으로, 인식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겸손한 인정이 ‘모름’이란 말에 담겨 있다. 대상을 지배하고 부수어 파악하려는 서양의 이성 중심 접근법에 대한 근본적 반성으로, 알지 못하는 대상에게 물으면서 스스로 알려주기를 기다리고 내가 깨달아 알게 되기를 기다리는 동양적 인식론을 말한다.

서양의 인식론과 신학으로는 성경의 생명 사건과 우리의 삶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인식에서 나온 이 인식론에서는, 인식 대상이 수동적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인식 행위에 참여하게 된다. 인식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가 깨지고, 인식 대상을 신뢰하고 하나가 되는 인식론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생명 신학, 즉 ‘살림의 신학’으로 나아간다.

“모든 생명은 주체이므로 객관적 논리와 개념만으로는 생명의 진상에 다가갈 수 없다”는 문장으로 시작해, 전신 소아마비에 걸려 자주 넘어졌던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교도소 높은 담 벽 빈틈에 피어난 풀꽃을, ‘생명’이란 단어의 역동성에 녹여 신학의 뼈대를 세웠다. 생명은 ‘모름지기’ 어린아이의 펄떡거리는 심장 소리에서 가장 생생하게 느껴지는 법.

▲저자 박재순. ⓒ페이스북

“성경은 참 생명이 분출하는 책이다. 생명신학적 성경 읽기는 나의 생명과 성경의 생명이 만나 새 생명이 분출하게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신학의 해석은 해석학적 이론과 언어를 통해 이해와 해석을 추구하는 서구의 해석학적 전통과는 달라야 한다. … 뜻풀이만 추구하지 않고, 성경의 생명을 만나고 경험하고 그 생명이 오늘 나의 삶에 살아나게 하려는 것이다. … 성경 읽기를 통해 문자에 갇힌 예수가 오늘 나(우리)의 삶 속에 살아나고 이기적인 자아 속에 갇힌 ‘내’가 죽고 ‘나’와 타자를 위해 자유로운 새로운 ‘나’로 살아난다(38-39쪽).”

1부는 ‘생명신학, 어떻게 할 것인가?’, 2부는 ‘평화를 이룩하는 신학’, 3부는 ‘살림의 신학과 실천’으로 구성돼 있다. 씨알사상연구회 초대 회장을 지낸 저자는 2007년 재단법인 씨알을 설립하고 씨알사상연구소장으로서, 대학 시절부터 강의를 들었던 함석헌과 그의 스승 유영모의 씨알사상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서울대 철학과에서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에 매력을 느끼며 공부했고, 한신대에 편입해 안병무 교수에게 성서신학과 민중신학을, 박봉랑 교수의 지도로 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을 공부했다. 1970-80년대 정치적 문제로 감옥살이를 하면서 많은 책을 읽었다. ‘서구의 인식론과 신학방법론을 반성하고, 우리 신학의 길을 트는 역작!’이라는 문구가 아깝지 않다.